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늙으면 물러나야, 노퇴老退와 궤장几杖 하사

by taeshik.kim 2020. 9. 16.
반응형

앞선 강의 혹은 글에서 나는 595년생인 김유신이 만 70세가 되는 해(664) 정월에 사표를 집어던지는 장면을 근거로 70세가 되면 치정致政한다는 예기禮記 왕제王制편 언급이 불문률처럼 통용하는 신라사회 한 단면을 소개하면서, 이런 모습이 고려시대에는 더욱 극성을 부리면서, 때로는 이것이 중요한 정치역학 구도가 되어 정적을 퇴출하는 방법으로 작동하기도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조선시대 이경석 궤장. 경기도박물관 소장

 

나아가 70세 퇴직을 허락하면서, 혹은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 무렵이면 임금이 그 원로신하한테 궤장几杖이라는 지팡이와 의자를 하사하면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기를 기원하는 의식과 더불어, 그런 사람이 궁궐을 출입할 적에는 허리를 굽히지 아니해도 되고, 임금 앞에서는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아니해도 되며, 가마를 타고 들락거릴 수 있게 했음을 덧붙였다.

 

이것이 결국 조선시대가 되면서는 기로소耆老所로 제도화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이제 고려시대에 나타나는 70세 치사致仕와 관련한 예화들로서 내가 그간 고려사를 읽으면서 메모해둔 것들을 통해 그러한 면모들을 살피기로 한다. 

 

고려사절요 제4권 문종 인효대왕1 文宗仁孝大王一 정해 원년(1047) ○ 12월...이부吏府가 아뢰기를 “예전 제도에는 모든 관료가 글을 올려 노퇴老退를 청하지 아니해도 69세가 되면 그해 말에 해직되는 것이 예인데, 이제 다방태의소감茶房太醫少監 김징악金徵渥은 치사할 나이가 되었으니, 마땅히 파면해야 합니다" 하니, 제制하기를, “징악은 명의名醫로 그 직책이 근시(近侍)에 있으니, 수년 간 더 그 자리에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조선시대 이경석 궤장. 경기도박물관 소장

 

이를 통해 늙어 물러남을 노퇴老退라 했으며, 정확한 퇴직 시점은 69세를 꽉 채운 시점, 곧 70세가 막 도달하는 그 시점이었음을 안다. 이는 김유신한테서 이미 확인한 사안이다. 

 

그럼에도 예외가 없지는 않았으니, 문중은 정년퇴직 대상이 된 김징악은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의사라 해서 예외를 두고자 했음을 본다. 다시 말해 70세 퇴직은 권고사항이었으면 법률적 강제가 아니었음을 본다. 다만, 권고라 해도 강력한 제어로 작동했음을 본다. 

 

고려사절요 제5권 문종 인효대왕2 정유 11년(1057) ○ 12월에..좌복야 지맹智猛이 늙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니, 은혜가 두터운 조서를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는데, 중서성이 아뢰기를 “70세에 치사致仕하는 것은 예이니, 윤허하소서" 하니, 제하기를, “내가 일찍이 지맹의 선조가 국가에 공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가 이번 노퇴老退를 청하기 전에, 이미 수년 동안 조정에 머물도록 허락하고 이어 궤장几杖을 내려주겠다 하였는데, 이제 중서성이 아뢰는 바에 따라 전에 한 말을 갑자기 고치면 맹이 짐더러 희롱하였다고 할까 두려워하노라." 하였다. 중서성이 또 아뢰기를, “예제禮制에 '원로대신으로서 천지의 일을 아는 자에게는 궤장을 하사한다' 하였는데, 이제 맹은 한갓 문음門蔭을 의지하고 있을 뿐 천지의 일을 알지 못하고 또 전쟁에서 노고한 것도 없으며, 그 밖에 정사에 자문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대의 공로를 생각한다면 1년 동안 조정에 머물게 함은 옳지만 수년이나 더 머물게 하고 또 궤장을 내려줌은 예우가 너무 지나칠 듯하니, 이미 내리신 명을 회수하소서." 하니, 따랐다. 

 

70세를 넘어 몇 년 동안 계속 쓰는 신하를 쓰자, 다른 신하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부당함을 논하면서 결국 퇴직을 관철시킨 보기다. 임금은 사전 약속을 근거로 내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계속 쓰겠다 했지만, 중서성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조선시대 이경석 궤장. 경기도박물관 소장

 

덧붙여, 해당 신하가 정식 과거시험이 아니라 조상 음덕이라는 백으로 관직에 진출한 데다, 공로도 없이 물러나지 않고, 더구나 그 상태에서 궤장까지 하사받은 일은 부당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70세 이후에도 관직생활을 계속 하려면 무엇보다 공적이 뚜렷해야 함을 엿본다. 궤장 역시 그런 신하한테 주는 법이다. 

 

동국통감 권19 고려기高麗紀 고려 숙종 8년, 계미년癸未年(1103) ○ (봄 정월) 문하시중 소태보邵台輔가 세 번 표문表文을 올려 청로請老하니, 온정 어린[優渥] 조서를 내리고는 윤허하지 않고, (대신) 궤장几杖을 내려 (계속) 일을 보게 했다.

 

소태보는 1034년생이다. 따라서 70세에 도달하는 시점 그해 정월에 사표를 내는 관례에 따라 거푸 세 번이나 사표를 던졌다. 다만, 여러 이유로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앞서에서는 70세 퇴직을 노퇴老退라 했지만, 예서는 청로請老라 하니, 이 경우는 자발적으로 물러나고자 하는 뜻이 강하다. 전자가 자동빵으로 해직된다는 개념이 강하다면 말이다. 

 

덧붙여 70세를 넘겨 계속 부려먹고자 할 때 궤장을 하사했음을 본다. 

 

조선시대 이경석 궤장 중 杖. 경기도박물관 소장. 살포 모양이다. 

 

동국통감 권19 고려기 숙종 9년, 갑신년甲申年(1104) ○ (겨울 11월) 중서시랑 평장사로 치사致仕한 김선석金先錫이 졸卒했다. 김선석은 청렴하고 의지가 굳세며, 이재吏才가 있고 산업產業을 일삼지 않았으나, 나이 70세가 되도록 미련이 있어 벼슬에서 물러나지 않아 사람들이 비난했다.

 

이로 보아 70세가 넘어서도 사표를 던지지 않는 일이 사람들한테 지탄을 받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고려사절요 제11권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 무진 2년(1148) ○ (8년) 12월에..임원애를 수태위 안정공守太尉安定公으로 삼고, 부府를 개설하여 수령부壽寧府라 이름하고 요속僚屬을 두었다. 김부식을 수태보 낙랑군 개국후守太保樂浪郡開國侯로 삼고 이내 치사케 하고, 이인실을 중서시랑 도평장사 판리부사로, 고조기를 참지정사 판병부사로, 김영관을 참지정사로, 윤언이(尹彦頤)를 정당문학으로, 문공원을 어사대부 지추밀원사로, 유필(庾弼)을 추밀원부사로 삼았다.

 

임원애한테 수령부라는 부를 만들어 요속을 두었다 함은 이는 파격 대접으로, 이 사람 개인을 하나의 관부官府로 간주하고 그 운영을 위한 별도 정부조직을 두었다 함이니, 이는 결국 동아시아 봉건제에서 그를 실상 제후 대접했다는 뜻이다. 안정公이라 함은 그를 공작으로 대했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이경석 궤장 중 杖 머릿 부분. 경기도박물관 소장

 

이와 함께 김부식은 개국후開國侯로 삼았다 함은 후작 대접을 했다는 뜻이니, 이 역시 주대 봉건제 시스템이다. 한데 이로 삼는 동시에 치사케 했다는데 이는 고려시대에는 대체로 흔한 퇴직 시스템이라, 등급을 더 높여주고서는 원로대신을 퇴직케 하는 것이다. 

 

명예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실질을 동반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퇴직관료 역시 녹봉이 깎이기는 했지만, 이 마지막 등급에 준해서 녹봉을 받았으며, 그에 따른 대접이 만만치 아니했기 때문이다. 

 

김부식은 1075년 생이라,  74세에 퇴직했다.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한편,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등 공로가 적지 아니해서 정년퇴직 연령보다 4년을 더 쓰고는 퇴직을 허락한 것이다.

 

보낼 때 잘 보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불만이 없는 법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