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기자 17년] (24) 세비야에서 겪은 이건무(1)
세계유산위원회 얘기가 나온 김에 2009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 일화로써 이건무 선생 얘기로 들어가 볼까 한다.
당시 그는 문화재청장이었다.
두계 이병도 손자인 그는 깐깐한 인상을 주며, 실제로도 과묵한 편이고 꼬장꼬장한 공무원으로 소문이 났다.
결코 드러내는 성정이 아니라 일 처리 역시 조용한 편으로 평가된다.
그런 까닭에 기자들과 사이가 나빴다고는 할 수 없지만, 좋다고도 할 수 없었다.
더 툭 까놓고 말해 기자들에게 그는 재미가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특별히 친한 기자도 없는 듯 했고, 그렇다고 척을 진 기자도 없었다.
왜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이렇다 할 맛이 없는 그런 사람 말이다.
이건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나에게도 역시 그랬다.
나서는 성격도 아니요, 그렇다고 무슨 조직이니 모임이니 해서 그런 자리에 기웃거리는 성격이 아님에도 이상하게도 문화계에서 그만큼 관운이 튼 인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화려하지 않은 듯하지만, 관운은 타고 난 듯 1973년 일용직 잡급으로 시작한 국립박물관에서는 각종 요직을 거쳐 2003년 3월 31일에는 마침내 그 수장으로 차관급인 관장에 임명되어 2006년 8월 8일까지 3년 넘게 재직했다.
이 기간에 박물관은 새용산 시대를 개막했다.
그는 국립박물관 시대에 내부 출신 박물관장의 대미라 할 만 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관장은 내부 출신이 사라져 김홍남과 최광식에 이어 지금의 김영나에 이르는 외부 출신 임명직의 소위 낙하산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그는 관장 퇴임과 더불어 용인대 문화재관리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새로운 보금자리를 틀었다.
이미 환갑이 된 그가 원한 자리라기보다는 이 학교, 혹은 이 학과가 원해서 ‘모셔갔을’ 것이다.
교수 정년이 65세이니 계획대로라면 교수 재직 기간은 불과 5년 남짓했을 뿐이다.
이것으로써 다들 이건무의 공직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런 그가 조금은 느닷없이 문화재청장으로 복귀했다.
새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2008년 3월 8일 그를 문화재청장에 앉혔다.
임용 1년차인 노년의 신임 교수가 다시 공직으로 나아간 것이다. 다들 뜻밖이라 했다.
여러 사람이 하마평에 올랐지만, 그가 심각하게 거론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무 자신도 왜 발탁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던 듯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장 그럴 듯한 배경 설명이 있기는 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사대강 운하를 추진할 예정이었다.
그것이 거센 반대에 부딪혀 결국 준설을 골자로 하는 주변 환경 정비로 돌아섰지만,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이 국책사업에서 문화재 업무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았다.
그것을 가장 합리적으로 대처할 인물로 새정부가 이건무를 골랐다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이 설명이 현재로서는 가장 그럴 듯하게 보인다.
실제 이건무는 2011년 2월 8일 물러날 때까지 약 3년간의 재임 기간 동안 내내 사대강 사업 문제로 골치 아픈 나날을 보내게 된다.
사대강 사업 자체를 반대하는 여론은 문화재를 그 방배막이의 하나로 삼고자 했다.
철저한 문화재 조사와 그 보호를 구실로 사업 자체를 지연시키거나 무력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이는 두고두고 이건무가 이끄는 문화재청에는 부담으로 작용했다.
나아가 실제로도 이 사업에 따른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그리고 그 보존 정책은 졸속이라는 비판이 다름 아닌 고고학계 내부에서도 끊이지 않고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 자신 고고학도로서 이건무는 꽤나 충격을 받은 듯 싶었다.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출신인 그는 고고학계 내부에서는 비교적 신망이 높았다.
그들과는 음으로 양으로 선배 후배, 친구 혹은 제자급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사대강 사업에 따른 온갖 비난이 이들로부터 날아들자 더러 기자들 앞에서도 공개적으로 역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고 나는 기억한다.
유별나게 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렇다 할 악감정은 없는 그를 내가 비교적 가까운 자리에서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저 세비야 출장이었다.
세비야 세계유산위에서는 우리가 신청한 조선왕릉이 등재될 예정이었다.
등재를 위한 제반 준비는 전임 청장 유홍준 시절에 대략 윤곽은 갖추었다.
이를 발판으로 이건무 시대가 되어 마침내 등재가 확정된 것이다.
세계유산위 자문기구인 이코모스에서는 이미 그 전에 ‘등재 권고’ 판정을 했으므로 이 회의가 부담은 없었다.
하지만 대회장에서 등재 결정 순간을 지켜보던 그는 내내 조마조마한 표정이 역력했다.
등재가 확정되고 조금 지나 그가 한 말이 기억난다.
“이미 정해진 것이라 해도 막상 되게 떨립디다.”
당시 나는 이 회의에 국내에서 파견된 한국기자로는 유일하게 현지 취재를 했다.
다른 언론사로는 KBS인가에서 유럽 쪽 어느 지역 특파원이 왔었다고 기억한다.
나는 문화재청 초청 형식을 빌려 현지 출장을 갔다. 그러니 당연히 제반 경비는 문화재청에서 댔다.
혹 문화재보호재단이 댔을 수도 있지만, 어차피 재단이야 문화재청 산하 기관이니 이거나 그거나 피장파장이다.
당시 출장 기간은 4박5일이었다고 기억한다. 대표단이야 물론 먼저 현지에 가 있었고, 나는 이건무 청장 일행과 같이 움직였다.
당시 청장 수행은 지금은 문화재청 문화재 보존관리국장으로 재직 중인 김홍동 국제교류과장이 했다.
통역 요원으로는 같은 국제교류과 무형문화재 담당인 박정은 양이 수행했다.
세계무형유산 분야에서 괄목할 재원으로 내가 서슴지 않고 꼽는 박양은 별정직으로 근무하다가 여러 이유로 나중에 결국 문화재청을 떠나고 말았다.
이 점이 지금도 두고두고 나로서는 아쉽기만 하다.
이 4박5일을 거의 붙어 다니면서 겪다 보니 이건무라는 사람은 겉보기와은 왕청나게 달랐다.
과묵한 줄로 알았던 그는 평소 본대로 눌변에 가까웠고 말이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지도 않았다.
그리고 막연히 깐깐하게 보이는 인상보다는 훨씬 재미난 사람이었다.
그를 가까이한 사람들이야 잘 알았겠지만, 나로서는 뜻밖의 발견이었다.
조선왕릉 등재가 확정되고, 관련 기념 행사 같은 거추장스런 일들이 끝난 뒤에는 세비야 일대 주요 박물관과 볼거리를 보고 우리는 그라나다로 향했다.
이곳에 와서 알람브라 궁전은 보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실제 문화재청에서는 이에 맞추어 알람브라 궁전 관리 책임자와의 청장 면담을 미리 주선해 놓은 상태였다.
그곳을 향하는 길에 엄청난 해바라기 밭을 보고는 다들 탄성을 지를 때 이건무 역시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한데 그는 천상 고고학도였고, 개중에서도 그의 주된 관심사인 청동기 고고학도임은 어쩔 수 없었다.
세비야박물관에서 로마시대인지 아니면 그 이전 시대인지는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비파처럼 생긴 동검을 보고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이거 비파형 동검이네, 동검이야”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당시 세비야로 들어간 경로가 기억에 확실치는 않다.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 마드리드를 거쳐 세비야로 들어간 듯 하나, 다만 하나 마드리드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마드리드 공항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비행기를 갈아타는 도정에서 나는 지갑을 분실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여권은 잃어버리지 않았지만, 지갑에는 내가 현지에서 쓸 요량으로 약 100만원 정도 바꾼 유로화와 한화 몇십 만 원, 그리고 각종 신용카드가 들었다.
그걸 분실했으니 소위 멘붕에 빠지고 말았다.
이 지갑을 나는 당시 팩 가방에 담은 채 돌아다녔는 것인데 그만 지퍼를 잠그는 것을 잊어 공항 어딘가에서 흘려버렸거나, 혹은 누가 소매치기했을 것이다.
어떻든 사태는 수습해야 했으니, 한국에 있는 집사람에게 화급히 전화를 걸어 일단 카드를 정지했다.
자포자기한 심정에 빠져있으니, 박정은 양이 혹시 모르니 내가 움직인 동선을 따라 공항 쓰레기통을 뒤져보자고 했다.
이건무 청장을 비롯한 일행들은 세비야행 비행기를 찾아 떠나고 나는 박양을 따라 투덜투덜 쓰레기통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한데 그렇게 뒤진지 얼마 되지 않아 박양이 “기자님, 찾았어요” 하는 게 아닌가? 보니 내 지갑이었다.
유로화만 쏙 빼가 버리고 나머지 한화와 신용카드는 그래도 둔 채 버렸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게 한화야 그들에게 별 쓸모가 없다 해도 신용카드는 왜 두었는지 모르겠다.
어떻든 이만하길 다행이었다.
세비야에 도착해 호텔에 투숙한 그날 밤, 이건무 청장이 나를 자기 방으로 부른다는 전갈을 받았다.
들어갔더니 그가 유로화 얼마를 나한테 주는 것이 아닌가?
내가 현지에서 쓸 돈이 하나도 없게 되었으니, 이거라도 쓰라고 주었다.
물론 나는 고맙게 받았다. 그 액수는 밝히지 않겠다.
한데 내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이 그것을 건네는 그의 표정 혹은 방식이었다.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하면서 혹시라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거듭 했다.
나는 두 가지로 본다. 첫째, 이것은 촌지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둘째, 혹여라도 내가 거절할까봐 해서였다.
그 장면과 표정을 물끄러미 보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웃고 말았다.
“이 양반은 촌지를 주어 본 적도 없고, 받은 적도 없는 사람이구나.”
(2016. 3. 3)
***
이런 그를 며칠 전 한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 부친상 건국대병원 빈소에서 조우했다.
실로 오랜만이었으니, 역시 연세는 속이지 못했으니 이전보다 부쩍 연세 든 모습이었거니와, 하긴 칠순 넘기고 이젠 팔순을 향해 달려가는 연세니 말이다.
그 자리에 김재홍 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있었는데, 그런 자리서 선생이 날더러 대뜸 "거 박물관 좀 이쁘게 봐주세요" 하는 것 아닌가?
아! 이 양반이 내가 박물관에 대해 아픈 소리 많이 하는 걸 들으셨구나 했다.
그러고 보면 요샌 박물관 쪽 이야기는 거의 안 했는데? 주로 문화재청을 겨냥했는데?
그건 그렇고 저 양반은 문화재청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할 수 없는 박물관 맨이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박물관맨이었다.
천상 그는 그런 양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