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 이모저모

알바승과 금수저승, 그 건널 수 없는 간극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2. 27.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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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은 쿨쿨 자고, 원효는 벌컥벌컥 해골물 원샷! 전날 거나하게 땡긴 갈증이다.



비중국권 불교 승려 중국 유학 양태를 보건대

그 머문 기간에 따라 단기 알바승과 장기체류승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예서 그 기점은 대략 10년 안팎이라

문화권별 뚜렷한 차이가 있으니 신라가 대체로 장기체류승인 데 견주어 동시대 일본은 단기 알바승이라

원광과 의상을 필두로 신라 승려들은 하대 무염에 이르기까지 유학기간 기본이 10년이라

이런 사람들 특징이 유창한 중국어였으니 실제 귀국해서도 외교문서 작성에 개입하기도 했으니 원광이 대표적이며

나아가 오랜 생활 구축한 인망을 토대로 본국 간첩생활을 하기도 했으니 의상이 그렇다.

이들 특징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대재벌가 일원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장기체류 근간이 된다.

돈이 있어야 도도 닦고 공부를 할 게 아닌가?

 

일본이 보낸 견당사



그에 견주어 일본 유학승들은 하나 같이 거지였다.

겨우 상선 혹은 사절단 따라 배편 귀퉁이 얻어타고 중국으로 갔으니

암것도 가진 것도 없어 알바를 해야 했으니 대개 1년 안팎 머무르다 다시 거지로 귀국한다.

옌닌?

거지처럼 떠돌이 생활하다 회창 회불로 진짜 거지로 귀환했다.

최짐? 공해?

다 거지였다.

말석에라도 끼고 싶었지만 돈 없는 왜국 승려 누가 쳐다봐주기나 한가?

거지처럼 떠돌다 노잣돈 떨어지니 다시 거지처럼 귀국했다.

이 점에서 이례가 대각국사 의천이다.

그는 불과 일년 남짓 있다 귀국했다.

다만 그는 위상이 다른 단기코스승과는 현격히 달라 위로 형 셋이 모조리 국왕이었고 왕태후 엄마한테서 재산이란 재산은 물쓰듯 갖다 썼다.

그에게 중국유학은 질이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 중국 다녀왔다

딱 이 한 장 증서만 필요했으니 그것이 중국 유학증이었다.

다시 돌아가서 최징이니 공해니 하는 승려들한테 중요한 것은 하버드예일 옥스브리지 졸업장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도 그 내실은 검사하지 않았으니 설혹 한다 해서 검증될 사안도 아니었다.

오직 중요한 건 도항증이었다.

이 자랑스런 도항증 훈장에다 나는 누구의 제자임을 포장한 기술 이것이 저들이 성공한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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