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되치기 당한 박연암[2] 신흥사 중들한테 쫓겨나고
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가 수록한 박지원 공문서 중에는
그가 양양부사 재직 시절 직속 상관인 강원도순찰사한테 올리는 글이 있으니
연보에 따르면 그가 양양부사가 된 시점은 1800년, 64세 때라,
그해 6월에 정조가 승하하고 두 달 뒤인 8월에 양양부사가 되었거니와
이 글은 부사 취임 100일이 지난 새해에 올린 문서라 하니,
순조 1년, 1801년 새해 벽두임을 추찰한다.
이에서 연암은 관내 신흥사가 각종 불법을 자행하고 있지만, 그것을 제어해야 할 상부,
특히 강원감영과 중앙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들을 두둔하고 있다면서 그것이 불합리하다는 감정을 격정적으로 토로한다.
지금 예조의 관문關文에 “신흥사神興寺의 잡역을 경감한 뒤로 종이에 먹도 마르기도 전에 불법 징수가 전보다 10배나 더하다.”고 하고, 심지어 ‘수향리首鄕吏를 상사上使하여 엄형으로 다스리라’는 조처까지 있으니,
그 땅을 맡아 다스리는 수령으로서는 너무도 놀랍고 두려워 몸 둘 바가 없습니다.
지난해 여름에 잡역 경감에 대한 절목節目을 영문營門 감영으로부터 반첩反貼받아 책자로 만들어서,
하나는 영문에 비치하고 하나는 본부本府9양양부)에 비치하고 하나는 그 절에 보내어 증빙할 자료로 삼았으니,
설사 탐관오리가 있다 한들 어찌 구구하게 몇 권卷의 종이를 절목 이외에 더 징수하려 하겠습니까.
또 관속官屬들이 시방 그 절로부터 협박받는 처지가 되어, 조심조심 날을 보내며 오히려 털끝만큼이라도 탈이 잡힐까 두려워하는 판국인데,
또한 어찌 감히 멋대로 10배의 불법 징수를 자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利害를 놓고 헤아려 보면 절대로 이럴 리는 없습니다.
진실로 관문의 내용과 같다면, 아무 것도 꺼릴 바가 없는 듯이 구는 절의 중들이 어찌 절목을 하나하나 들어 본관本官(양양 부사)에게 따져 바로잡지도 않고,
또한 어찌 의송議送을 순사또에게 올리지도 않고서, 감히 감영과 고을을 무시한 채 단계를 건너뛰어 경사京司(중앙관청)에 호소하여 무난히 사실을 날조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하관下官이 재임한 지 지난해 시월 보름부터 이달 그믐까지 겨우 100일을 채웠습니다.
그래서 고을 일에 대해서는 아직 두서를 자세히 알지 못하니, 시행해야 할 모든 일은 단지 문서화된 규정을 살펴 행할 뿐입니다.
이른바 삭납지지朔納紙地는 두어 권에 불과한 데다, 비록 명색은 관납官納이나 본래부터 넉넉한 값으로 사서 썼으며, 지금은 또 값을 더 쳐주고 있습니다.
그 밖에 감영에서 소용되는 지석紙席(두꺼운 종이로 만든 자리)과 상사上司(직속 상급 관청)에 전례에 따라 납부하는 것도 모두 본전本錢으로 직접 샀으며 조목에 따라 값이 매겨져 있으니,
한 번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세세한 일이라 많은 변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세한 전후사정을 알기 어렵지만, 간단히 정리하면 신흥사 관할 지방관청인 양양부에서 신흥사에다가 각종 부당한 공납, 특히 종이를 징수했다 해서
중앙정부에서 질책을 받고, 나아가 그에 책임이 있다 해서 담당관리들이 경고까지 받은 모양이라
박연암은 이 처사가 부당하기 짝이 없다며,
이리 된 까닭은 무엇보다 신흥사 쪽에서 협잡을 일삼고 중앙정부를 상대로 부당한 로비를 했기 때문이라고 분개한다.
무엇보다 연암은 신흥사 중들이 양양부는 제끼고 중앙정부를 상대로 직접 로비를 한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린다.
급기야 그는 이렇게 말한다.
대저 본부本府(양양부)에 신흥사가 있는 것은 바로 한 고을의 난치병과 다름이 없으며,
그 절에 창오昌悟와 거관巨寬이라는 승려가 있는 것 역시 그 절의 난치병과 다름이 없습니다.
저놈들이 하찮은 중으로서 여러 해 동안 서울 근교의 산들에 머무르면서,
중들을 꾀고 협박하여 절 재산을 탕진했는데, 말과 외모가 간사스럽고 종적이 수상합니다.
무뢰배와 결탁하고 외람되이 막중莫重한 곳을 빙자해서,
오로지 수령을 모함하고 관속들에게 위엄을 세우는 것만을 일삼는 것이 제놈의 수법인즉,
관리가 관리 노릇 못 한 지가 오래입니다.
토호들이 시골 구석에서 무단武斷하고 관부官府를 쥐고 흔드는 일이 옛날부터 간혹 있었지만,
중들이 이같이 제멋대로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은 지금 처음 보는 일입니다.
신흥사 중 창오昌悟와 거관巨寬을 특별히 거론하면서 그들이 중앙정부,
특히 막중한 곳이라는 왕실을 직접 접촉해 그에다가 양양부가 종이를 부당으로 징수한다는 무고를 일삼고 있다고 지목한다.
그렇다면 신흥사는 무슨 힘이 있어 저런 막강한 로비력을 동원했을까?
연암의 진단이다.
전번에 내수사內需司의 관문 내용을 고쳐 바꾸고 용동궁龍洞宮의 수본手本(손수 작성한 서류 )을 첨부하였는데,
제일 먼저 강원도 양양에 있는 신흥사는 바로 열성조列聖朝의 구적舊蹟이 봉안된 곳이라는 점을 들고 수령이 삼가 받들어 행하지 않은 죄를 나열해 놓았으니,
이는 모두 창오와 거관에게 속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밝히지 못한다면, 제 한 몸에 갑자기 닥친 재난은 본시 걱정할 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고을의 폐해는 어찌하며 나라의 기강은 어찌하겠습니까?
급기야 연암은 신흥사가 열성조 구적, 곧 조선왕실과 관련한 보물을 많이 보관한 사찰이라는 주장 또한 거짓이라고 직설한다.
‘열성조의 구적’이라고 한 것은 본부에 있는 낙산사洛山寺와 같은 곳을 이름이요, 신흥사가 아닙니다.
세조 병술년(1466)에 낙산사를 임시 숙소로 삼으신 일이 있는 데다, 성종의 친필이 열 겹이나 싸여 보물로 간직되어 있고,
숙종의 어제御製 현판은 사롱紗籠에 싸인 채 걸려 있어 지금까지도 보배로운 글씨가 하늘을 돌며 빛을 발하는 은하수처럼 휘황찬란하며,
명 나라 성화成化 5년(1469)에 주조한 큰 종에는 당시의 명신名臣들이 왕명을 받들어 기록한 글이 있어 한 절의 귀중한 보물이 되었으니,
이것들은 모두 낙산사의 오래된 보배인 것입니다.
신흥사의 경우는 명 나라 숭정崇禎 갑신년(1644)에 새로 창건하여 내력이 100여 년밖에 되지 않아 역대 임금들이 남긴 글들이 본래 있지 않은데도,
감히 모호하게 막중한 곳을 끌어다가 궁속宮屬들을 속여서 부탁하여 수본을 발급받기를 도모하기를 이처럼 쉽게 하였으니,
다른 것은 오히려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흥사가 역사를 조작해 거짓을 일삼는다는 토로다.
그러면서 신흥사가 왕실과 중앙정부의 비호를 믿고 날뛰며 각종 범법 행위까지 일삼는다 하면서
엎드려 바라건대 이러한 사정을 비변사에 보고하거나 장계狀啓를 올려 조사해 주도록 청함으로써,
요망한 중놈들이 막중한 곳을 빙자하여 속임수를 일삼는 죄를 속히 시정하게 해 주심이 어떻겠는지요?
이 사태는 어찌 되었을까?
이를 해제한 한국고전번역원은
1801년 음력 1월 강원 감사에게 양양 신흥사神興寺 중들의 행패를 바로잡아 줄 것을 청원한 편지이다.
그러나 강원 감사가 미온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그해 봄에 연암은 병을 핑계 대고 양양 부사직을 사임했다고 한다. 《過庭錄 卷3》
되치기 당한 것이다.
미온적이었기에 사표를 던진 것이 아니라, 신흥사와 그 중들한테 되치기 당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쫓겨난 것이다.
쫓겨나고서도 쫓겨났다 하면 쪽팔리기 짝이 없어 항용 저런 방식으로 스스로 사표를 집어던졌다고 할 뿐이다.
조선시대 일방적으로 얻어터지기만 했다는 불교, 그리 간단한 동네가 아니었다.
그들은 왕실을 움직였고, 곳곳을 파고들어 막강한 영향력을 때론 행사하기도 했다.
이는 불교가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 previous article ***
불교 우습게 봤다 되치기 당한 연암 박지원[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