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금갑射琴匣을 심판한다](5) 정월 15일은 절요와 통감 논술이다
삼국유사 역주본으로 국가기관에 의한 웹서비스까지 장착하는 바람에 가장 널리 활용되는 것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판이라 할 수 있거니와,
이에는 당시까지 거의 모든 관련 연구성과를 집약했다 할 만한 노작이다.
그에서 사금갑을 역주하면서 저 사금갑 사건 발단이 되는 무대 천천정天泉亭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주석이 있다.
현재 천정정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조에는 신라 소지왕 10년 정월 15일에 왕이 천정천에 행차하였다고 하여 ≪삼국유사≫의 기사보다 자세한 날짜를 기록하고 있다.
반면 ≪삼국사기≫에는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명색이 역사로, 고대사로 밥을 빌어먹고 산다는 자들이 아무도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을 아무도 보지 않았다고 내가 질타하는 정당성은 이에서도 여지없이 폭로된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저 말마따나 삼국유사에는 저 사금갑 사건이 언제 발생했는지 그 정확한 시점에 대한 논급이 없다.
다만, 저 이야기 뒤에 붙은 정월 오기일烏忌日 관련 논급을 보태면 정월 15일임을 추찰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도 아주 면밀히 살펴야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한데 정확하지 않은 저 발생 시점이 삼국유사에는 보이지 않는 대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정월 15일이라고 떡 하니 날짜가 박혀 나온다.
저날 비처왕, 곧 소지왕이 천천정이라는 곳으로 행차했다가 저와 같은 일이 있었다 한다.
삼국유사 역주자들은 저 날짜가 신증승람에 나온다 했지만 천만에!
신증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세조에 의한 편찬 명령이 나오고, 성종시대에 앞서거니뒤서거니니 해서 각각 완성된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에 이미 나오기 때문이다.
신증은 그 전대에 보이지 않는 정월 15일을 처음으로 들고 나온 것이 아니라, 절요와 통감을 토대로 저리 옮겨적었을 뿐이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절요와 통감이 나온 이후에는 그 누구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읽지 않았다고?
따라서 저 주석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비처왕이 천천정에 행차한 날짜는 삼국유사에는 보이지 않으나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에는 정월 15일로 못박혀 있다. 그 후대에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각종 논급은 절요와 통감의 기술을 계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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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금갑射琴匣을 심판한다](4) 조선시대 지식인은 누구나 안 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