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리 금표孔德里禁標에서 읽어내는 무상한 권력
유동 인구와 지하철 환승 인구가 많은 서울 마포구 공덕역. 이 공덕역 3번 출구를 나오면 롯데캐슬이라는 고급 아파트가 우뚝하며, 그 앞에는 노송 몇 그루와 벤치가 있는 조그만 공원이 있다.
공덕역 3번출구
이 공원 앞에는 사진처럼 ‘공덕리 금표(孔德里禁標)’라는 안내문과 비석이 섰다. 금표는 조선시대 민간인 통행을 막기 위해 세운 경고 안내판으로, 지금으로 말하자면 ‘출입금지, 금지구역’과 같다.
공덕리 금표와 그 안내판
아소성 푯돌. 흥선대원이 거처인 아소정이 있다는 안내판으로, 120보 떨어진 곳에 아소정이 있으니,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금지 팻말이다. 동치同治 경오년(1870) 8월에 세웠다.
이 금표는 조선 후기, 최고 권력자 흥선대원권 이하응 별장이 있었기에 일반인들은 함부로 출입할 수 없다 해서 세운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거처한 집은 안국동 운현궁, 부암동 석파정, 공덕동 아소정 세 곳이 있었다. 아소정(我笑亭)은 고종이 등극하고 명성황후와 권력 투쟁에서 물러난 뒤부터, 흥선대원군이 거처하던 곳이다.
지금이야 공덕역은 서울 요지 중 하나지만, 조선후기까지만 해도 이곳은 도성 밖 경기도에 속한 곳이다. 이하응이 도성을 떠나 이곳에다가 집을 세운 이유는 한강의 여의도와 밤섬에서 유유자적하며 말년을 보내고, 젊은 시절을 반성하자는 의도에서였다고 한다. 그래서 당호도 ‘나를 비웃는다’는 뜻이다.
아래는 1890년대 아소정 모습을 담은 사진 두 장이다.
하지만 한번 맛본 권력은 너무나 달콤했다. 그런 유혹을 이기지 못했으니, 이곳에 거처하던 이하응은 또 다시 권력 중심에 서게된다. 을미사변과 그에 따른 민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금 권력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권좌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리고 이곳 아소정에서 유폐되어 지내다가 이곳에서 파란 많은 생애에 종언을 고하고 만다.
봉원사로 간 아소정
이하응은 죽은 뒤에도 파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무덤은 처음에는 아소정에 있었다. 그러다가 이후 파주로 이장하고, 다시 경기도 남양주로 옮기게 된다. 그의 손때가 묻은 집안 구석구석은 장식물로 곳곳으로 팔려가고, 알다시피 그것을 헐어 봉원사를 짓는 자재로 사용되는가 하면, 건물 한 채는 몽땅 그곳으로 옮겨간다.
연세대 인근 서대문 봉원사에 지금 종무소로 쓰는 건물이 바로 이것이다.
바로 앞 사진은 2015년, 내가 촬영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흥선대원군 집터 위치를 알려주는 공덕리 금표는 이처럼 밑동까지 비교적 온전하게 드러나 있었다. 물론 다듬지 않은 밑둥까지가 본래는 땅에다가 묻는 부분이다.
그러다가 2019년 1월 현재는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변모했다.
한데 너무 많이 묻는 바람에, 아래쪽 글자까지 파묻히고 말았다.
나아가 이렇게 너무 파묻은 돌덩이 아래쪽을 보면 검은 때 혹은 얼룩까지 탔음을 본다. 이 검은 때는 무엇인가?
지나가는 개들이 이곳이 내 나와바리라 해서 찍찍 갈린 오줌이 남긴 흔적이다. 이하응이 다시 태어나 이 모습을 본다면 아소정이라는 말처럼 웃고 말려나? 껄껄 하고 말이다.
한편 아소정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결과는 이 이름을 단 음식점이다. 그 주인이야 실제 아소정을 기억하자 해서 이리 지었을 테니, 나름 운치 있는 상호라 하겠다.
지금까지 권력을 가져본 적도, 그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기에 나는 권력의 무상함이란 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공덕리에 있던 위풍당당 흥선대원군 집 아소정이 헐리고, 이곳 석재는 다른 곳으로 팔려갔으며, 이곳을 지키던 금표는 애완동물의 영역 표시장이 되고, 그의 당호는 유명 음식점이 된 상황에서 권력의 무상함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으로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