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퇴와 그 이웃-11] 문화대혁명 광풍 속 고고학자들
다음의 조연은 당연히 현장의 고고학자들이다.
마왕퇴가 발굴되던 당시의 중국상황은 험악했다.
1966년 시작한 문화혁명은 아직 불길이 다 잦아든 상태가 아니었다.
마왕퇴 발굴이 1971년에 시작하여 1974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중국 대륙에서는 문혁에 의한 공자 비판이 1973년에 시작되어
곽말약이 공자를 숭배한다고 비판받아 스스로 반성문을 써야 할 정도로 정세는 불안정했다.
이 당시 홍위병이 곡부의 공자묘를 습격해 크게 훼손한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정세에서 사실 마왕퇴 발굴과 연구를 진행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은 일이나 다름 없었다.
중국에서 나온 마왕퇴 발굴 관련 저서를 보면
이 당시 고고학자들의 생고생을 낱낱이 적어 놓은 것이 많은데
물론 사람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게 완벽하지는 못한 것이니만큼
이 당시의 중국 고고학자들도 적혀있는 글처럼 모두가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홍위병과 맞서 지키며 용감히 싸운 사람들만 있었는지도 사실 의문이기는 하다.
하지만 당시 문화혁명 당시의 정황을 보면, 이들이 마왕퇴를 발굴할 당시에는
문화혁명의 피크를 지나고 있으며 아직 개혁개방까지는 이르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주은래나 곽말약이 아무리 마왕퇴 발굴 가치를 옹호한다고 해도
언제 미친 문혁의 불길이 밀어 닥쳐 발굴하다 말고 끌려나가 조리돌림을 당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하겠다.
다시 말해 마왕퇴 발굴의 가장 큰 난관은 중국의 낙후한 기술이 아니라,
발굴 현장에 난입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홍위병들이었다 하겠다.
이런 상황에서 어려운 발굴을 기술도 없이 진행하여 마무리를 지은 당시의 중국 고고학자-.
아무리 찬사를 보내도 아깝지 않은 이들이다.
마왕퇴 발굴에 있어 단지 조연의 자리가 아니라 주연의 자리를 주어도 아깝지 않은 이들이
바로 이시기 활동한 중국의 고고학자들이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