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퇴와 그 이웃-12] 호남의학원
마왕퇴 이야기 또 다른 주연은 호남의학원이다.
마왕퇴 연구는 당시까지도 후진 경제를 못면하던 중국으로서는 전국의 의과학 역량을 딸딸 긁어 모았다고 해도 좋은데,
그 중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한 곳이 湖南医学院이다.
이 학교는 2차대전 이전에는 상아의과대학湘雅医科大学이라 일컬은 대학으로 1914년 미국 비영리재단인 Yale-China Association이 건립했다 한다.
한때 "북중국은 협화의대, 남중국은 상아의대"라고 불릴 정도로 대륙의 의학계를 양분할 정도였다고 한다.
국공내전 후 1953년, 상아의대가 호남의학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마왕퇴 무덤이 발굴되던 당시에는 이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호남의학원이 마왕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마왕퇴에서 미라가 나왔는데 정부에서는 문화재가 아니니 없애버리라는 명령을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호남의학원에서
발굴측과 접촉을 한 것이다.
이유는 문화혁명통에 홍위병들이 몰려와 의대에 있던 해부학 표본을 모두 갖다 버리는 바람에 학생을 가르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만 보아도 당시 문혁의 광풍이 정상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혁이면 문혁이지 도대체 의학 교육용 자료는 왜 버리는가 말이다!
따라서 당시 의대생을 가르칠 방법이 없던 호남의학원 해부학 교수들이 마왕퇴 미라가 보존상태가 아주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의대 학생교육용으로 내줄수 없겠느냐고 물어온 것이었다.
이때 당시에는 이미 총리인 주은래로부터 마왕퇴 미라는 보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온 상태였으므로
발굴측은 마왕퇴 미라를 호남의학원에 내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주은래가 이떄 보존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마왕퇴 미라는 이때 사라졌을 것이다.
박물관 측에서는 오히려 이 생전 처음 보는 2천년 전 미라를 어떻게 해야 보존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상황이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해부학교수들이 찾아왔으니 이들로서는 이 제발로 굴러들어온 떡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들은 되려 호남의학원에서 온 교수들을 상대로 마왕퇴 미라를 썩지 않게 보존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혹을 떼러 왔다가 되려 붙이게 생긴 호남의학원 교수들은 당시 할 수 없이 인체해부학 교육을 위해 시신을 방부처리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