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당 정인보의 딸로 세책본을 연구한 정양완
유춘동 선문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식민지시대 국학 전반에 걸쳐 활약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는 자식들 역시 여러 학문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냈으니, 저명한 도자사학자이면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정양모(鄭良謨. 1934~ )가 그의 아들이다.
정양완
동생 정양모 선생에 가린 감이 없지는 않으나 그의 누이 정양완 (鄭良婉 ) 역시 국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많이 남긴다. 1929년생, 아흔을 넘긴 그는 1956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64년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83년에는 역시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6년 동덕여중ㆍ고 준교사를 거쳐 1965년 이후 서울대ㆍ한양대ㆍ덕성여대ㆍ성신여대 강사를 역임했으며, 1976년 성신여대 조교수로 부임해 부교수로 승진했다가 1987년 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옮겨 4년간 봉직하고는 1990년 퇴임한다.
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년 기념식에서 김황식 총리와 악수하는 정양완. 2012.7.5. 연합DB
그의 주된 연구 분야는 한시였으니, 《'朝鮮朝後期 漢詩硏究-특히 四家詩를 中心으로》(1983) 같은 저서가 있다.
한데 이런 그가 뜻밖에도 세책(貰冊)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낸다. 그의 주전공이 다른 데인 까닭에 정양완의 세책 연구가 주목받지 못한 측면이 많다.
그는 1994년 《일본동양문고본 고전소설 해제(日本東洋文庫本古典小說解題)》 (국학자료원) 라는 단행본을 출간한다.
서문을 보면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을 간략히 적어 놓았다. 그에 의하면, 1970년 9월부터 1971년 9월까지 동양문고에서 우리 고전소설을 읽었고, 흥미 삼아 읽은 소설을 메모한 것이 노트가 6권 분량이었는데, 서지적 상황을 조사하지 못한 점을 보완해 작은 보고서로 이 책을 작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책에서 정양완은 동양문고에 존재하는 세책본 첫 면과 마지막 면을 정성스럽게 영인해 놓았으니 아래 사진도 개중 하나다.
아울러 당시로서는 국내에서 보기 어려웠던 《절화기담(切花奇談)》과 《비소기》 두 종도 권말에 영인해 넣었다.
내가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는 왜 세책을 다 제시하지 못하고 첫 면과 마지막 면만 수록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이런 생각은 실제 동양문고를 내가 방문해서야 깨닫게 되었다.
내가 일본 동양문고를 처음 가게 된 시기는 2000년으로 기억한다. 그때 환율은 1500-1600원 정도였다. 동양문고에서는 그때 복사비로 장당 100엔 정도를 받았다고 기억하는데, 이를 당시 기준으로 환산해보면 1장당 1500-1600원이라는 고가여서 전부를 복사할 엄두를 낼 수 없던 시대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선생은 자료를 복사하고, 또 뒤 책들을 정성스럽게 영인해주셨으니, 후학으로서 그 선구적인 업적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아니었다면 《절화기담》과 《비소기》 연구는 90년대에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