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신형준에 깨끗이 물 먹고는 깨끗이 엎어 버린 수촌리 대롱옥

taeshik.kim 2024. 1. 27.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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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공주 수촌리 백제 무덤 두 곳에서 대롱옥 한 점을 일부러 두 동강 내고는 그 무덤에다가 각각 한 조각씩 넣은 사실이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이는 조선일보 신형준 기자 독점 보도였다. 

문제의 기사를 접한 나는 이건 깨끗이 내가 물을 먹었다고 판단했다.

나는 쓰지 못했는데 다른 기자가 쓴 것으로 첫째 그것이 팩트에 기반하고, 둘째 충분히 다룰 만한 중요한 사안이라고 판단할 때, 언론계에서는 이를 물 먹었다고 한다.

그랬다. 나는 신형준한테 물을 깨끗이 먹었다. 

다른 기자한테 물 먹은 기사는 대개 아주 간단히 처리하고 말거나, 아니면 아예 다루지 않는다. 자존심 때문이다.

이는 비단 한국 언론만의 특징이 아니라 세계 어느 언론계나 있는 현상이다. 

다만, 이 건은 내가 아주 다르게 생각했다.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기자가 쓴 것을 따라가는 것을 언론계에서는 받는다 표현한다. 

받을 건 확실히 받자, 대신 어느 누구도 쓸 수 없는 기사를 쓰자. 이 수촌리 건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로서는 깨끗이 승복한 것이다. 

다만, 신형준이 쓴 것을 내가 그냥 받을 수는 없었다. 왜? 나는 신형준이 아니니깐.

그리하여 내가 그간 구축한 관련 자료집을 열었다. 

파경破鏡 혹은 부절符節, 약혼, 약속, 정혼 따위의 키워드로 그간 메모해둔 자료들을 모조리 꺼내들었다. 

그것들을 버무려 내가 작성해 물 먹은 그날 아침 송고한 기사가 아래다. 

나는 이 기사가 논문 한 편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기사가 책 한 권이라 생각한다. 

나는 고고학도들 연구성과 혹은 발굴성과를 그들이 읍조리는대로 전달하는 나부랭이가 아니다. 

그런 짓거리는 경멸한다. 

왜?

나는 기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촌리 고분군서 부절(符節) 추정 대롱옥
4·5호분 머리맡에서 각각 확인, 부부인 듯
입력 2005.06.16. 10:39 수정 2005.06.16. 10:39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삼국사기에 수록된 고구려 건국신화를 구성하는이야기 중 하나로 건국시조 고주몽高朱蒙의 큰아들인 유리琉璃가 아버지를 찾아가서 아들임을 확인하는 기이한 사연이 소개돼 있다. 

이에 의하면 유리는 7모서리 주춧돌 아래서 발견한 '단검 1단斷劒一段', 즉, 부러진 칼 한쪽을 들고서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을 찾아가니, 주몽이 지니고 있던 나머지 칼 한쪽과 맞추어 보고서 들어맞음을 알고는 마침내 아들로 인정받게 된다.

이와 아주 유사한 사례가 같은 삼국사기 설씨녀薛氏女 열전에서도 발견된다. 이에 의하면 율리栗里라는 곳에 사는 그녀는 사량부沙梁部라는 곳에 사는 소년 정혼자 가실嘉實을 6년 만에 다시 만난다. 

수자리 간 지 6년만에 다시 나타난 가실. 그의 몰골이 형편이 없어 설씨녀는 처음에는 가실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런 그들이 서로를 확인하기 위해 '파경破鏡'을 꺼내 들었다. 헤어질 때 두 조각으로 쪼개 각각 나눠 가진 거울은 결합됐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제후들을 분봉分封하면서 '단서철권丹書鐵券'을 제후왕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약칭 철권鐵券이라 하는 이 물건은 요즘으로 치면 훈장이나 임명장 정도가 되는데 항상 세트였다.

하나는 황실에 보관하고 나머지 하나는 제후가 갖는다. 명칭으로 보아 재료가 철鐵이었을 같지만 실제는 옥玉이 가장 애용됐다.

쪼갠 칼이나 거울, 세트로 제작된 철권이 모두 부절符節이다. 여기서 절節은 마디라는 뜻이니 끼워 맞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부符란 부합符合한다는 뜻이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제1장은 "해동海東에 여섯 용이 나시어[飛]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과 동부同符하시니"인데 여기서 말하는 동부同符가 바로 부절이다. 즉, 두 조각으로 깨서 나눠 가진 칼이나 거울, 혹은 세트로 제작한 철권처럼 아귀가 딱 들어맞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부절로 생각되는 유물이 최근 충남역사문화원(원장 정덕기)이 조사를 완료한 공주 수촌리 고분군에서 확인됐다. 

같은 공주 지역 무령왕릉 보다 빠른 5세기 중후반 무렵 축조됐다고 생각되는 수촌리 고분군 중 같은 횡혈식 석실분인 제4호와 5호분에서 각각 조각 형태로 출토된 유리 제制 대롱옥[관옥管玉]이 그것.

발굴 당시 책임조사연구원이었으며 현재 수촌리 유적 발굴보고서를 준비 중인문화원 이훈 연구부장은 "이 대롱옥 두 점은 원래 하나였으나 두 개로 부러뜨린 다음에 각각 4-5호분 시신 머리쪽에 부장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이렇게 하나로 결합된 관옥은 전체 길이 5.4㎝에 지름 1.2㎝가량이었다. 이 한 점은 중간쯤인 2.7㎝가량 되는 지점에서 절단이 나 있었다.

하나의 관옥 조각을 나눠 기진 두 무덤 피장자는 부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 근거로 이훈 부장은 "4호분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외에 남성 무덤에서만대체로 출토되는 환두대도環頭大刀가 확인된 반면 5호분에서는 이런 유물들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장식용 구슬이 집중 출토됐다"는 점을 중시한다. 즉, 4호분이 남편이며 5호분이 그 부인일 가능성이 아주 큰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궁금증은 남는다. 부부가 동시에 사망했다면 그 시점에 관옥을 쪼개 각기 다른 봉분을 만들면서 하나씩 넣어줬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현재까지 연구성과로는 두 무덤은 축조시기가 다르다. 즉, 5호분이 나중에 만들어졌다.

이런 추정이 타당하다면 이들 '부부'는 이미 생전에 변치 않는 사람을 약속하는 의미로 관옥을 쪼개 가지고 있었거나, 아니면, 남편이 먼저 죽는 그 시점에 부인이 장례를 치르면서 관옥을 쪼개 하나는 자기가 갖고 다른 하나는 남편의 시신과 함께 부장했을 것이다.

이런 부절의 전통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원류는 고대 중국에 있다. 중국적인 문화전통이 이미 수촌리 무덤에 짙게 투영됐다는 증거는 다름 아닌 이곳에서 중국제도자기가 여러 점 출토된 점에서도 간접 확인된다.

이번에 드러난 관옥이 부절임이 확실하다면, 이 수촌리 고분군이 축조되던 그 시점에 한성漢城(서울)에 중심을 둔 백제는 일종의 봉건제적 지방통치를 실시하고 있었음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백제가 공주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제후를 임명했건, 아니면 별도의 관리를 중앙에서 파견했건 상관없이, 이곳을 위임통치하는 관리는 왕에게서 그 위임을 상징하는 부절符節을 틀림없이 지니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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