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금갑射琴匣을 심판한다](4) 조선시대 지식인은 누구나 안 왕비
나는 계속 현대의 한국사 연구자, 특히 신라사 연구자들이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이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를 전제했다는 믿음하에 새로운 내용이 없다고 확신하고선 아무도 쳐다 보지 않았다는 말을 하거니와
실제 그랬다.
주변에 고대사로 수십 년 밥 벌어먹고 산다는 사람들한테 다 물어 봐라.
절요랑 통감 본 사람 있는지.
없다.
그러기는커녕 그걸 왜 보냐 되묻는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견주어 뭐가 더 새로운 내용이 있냐는 뜻이다.
하지만 시계추를 거꾸로 돌려 조선시대로 가면,
물론 삼국시대사를 누가 제대로 공부했겠느냐마는,
그래도 삼국 역사를 떠든 사람들은 모조리 삼국사기랑 삼국유사를 본 것이 아니라 실은 절요랑 통감을 봤다.
특히 후자 동국통감이 절대 교재였다.
간단히 말해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물론 절요랑 통감이 나오기 전에 산 사람들은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것이 나오고 난 다음에는 아무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대로 읽는 사람이 없고 거의가 다 신라 고구려 백제를 읊조린 사람들은 모조리 통감을 텍스트로 삼았다.
이게 그만큼 중요하다.
한데 앞서 봤듯이 저 사금갑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고 삼국유사에 등장하지만,
절요와 통감에서는 모조리 아마도 삼국유사를 근거로 삼은 듯은 하지만,
그렇다고 꼭 그런가는 별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 이야기를 다 해당 연조, 곧 소지왕 10년(488)에 수록하면서
내전분수승이랑 왕실 어두컴컴한 뒤편 거문고를 보관해 두는 박스 안에서 왕실 여인이 벌거벗고 나뒹굴다가 현장범으로 체포되어 복주되었다 한다.
한데 이 왕실 여인을 삼국유사에서는 궁주宮主라 했지만, 절요랑 통감은 왕비라 해서 전연 다른 이야기를 전개한다.
궁주야 후궁 중 한 등급을 말하지만 왕비는 무게감이 전연 달라서, 위선 액면 그대로 따르자면,
소지왕비가 바람을 피다가 걸려서 목이 달아난 사건이다.
이 사건이 어찌 파장이 크지 않겠는가?
삼국사기 소지마립간 즉위년 조에 이르기를 그의 왕비는 이벌찬伊伐湌 내숙乃宿의 딸 선혜부인善兮夫人이라 해서 구체적 실명을 거론하거니와,
이를 액면대로 따른다면 이 선혜가 중님과 바람피다 훅 날아간 것이다.
이 내숙이 이 사건이 있기 불과 2년 전인 소지왕 8년(486) 2월에 이벌찬伊伐湌으로 승진케 하고는 국정에 참여하게 했다 삼국사기 그의 본기에서는 밝히므로,
이때 내숙은 왕의 장인이 되어 이벌찬으로 승진했음을 추찰한다.
곧, 이로 보아 소지왕 8년 그의 딸 선혜는 소지왕비로 책봉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볼짝없다.
다른 왕비가 있었는데 모종의 이유(아마 죽음)로 궐위 상태였다가 후비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내숙 또한 따님이 왕비가 됨으로써 최고 국정 책임자까지 일약 승진한 것이다.
그런 선혜가 왕비 책봉 2년 만에 목이 달아난 것이다.
한편 그의 왕비와 관련해 삼국유사 왕력 편에서는 기보갈문왕期寶葛文王의 딸이지만,
구체적 실명을 알 수 없는 여인이라 해서 다른 내용을 적기하거니와,
바로 이 여인이 내가 말하는 선혜 이전 왕비다.
이는 오직 화랑세기만이 밝혀주거니와, 그에 대해서는 이전에 한 말도 있고 따로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모조리 통감을 봤으므로, 사금갑 사건을 논할 때면 항용 내전분수승이랑 알콩달콩한 왕실 여인을 왕비로 인식했다.
결코 궁주가 아니었다.
실제 동사강목에서도 안정복은 아예 복주된 왕비가 선혜라고 아주 못을 박고 있다.
한데 정작 근현대 역사학도 그 누구도 이런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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