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고총고분5

[고총고분, 그 환상의 타파를 위하여] (2) why를 궁구하지 않는 학문 일전에 내가 한국고고학은 개돼지도 3년만 시키면 한다 했더니, 그걸로 많은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고고학도를 개돼지에 비유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작금 한국고고학이 하는 학문이 개돼지도 3년만 교육하면 하는 거 맞다. 그것은 현상의 배열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 현상이란 개돼지도 3년만 교육하면 한다. 이번에는 그런 사례로 고분을 든다. 한국 고분고고학은 절대 다수 혹은 그 주류적 흐름이 양식 변화다. 고인돌 혹은 석관묘에서 옹관묘로 갔네, 목관묘로 갔네 목관으로 갔다가 목곽으로 갔네, 그러다가 석실분으로 갔네 어쩌네저쩌네 그러다가 고려시대로 넘어오면 고작 불교 영향 운운하며 화장이 많아졌네, 조선시대 와서는 주자가례 영향으로 회곽묘 회격묘가 많아졌네 어떠네 저떠네 하는 얘기 뿐이다. 이건 .. 2021. 3. 11.
고총고분高塚古墳, 그 오리엔트 환상특급을 폭파하며 젤로 무식한 놈들이 이대근이니, 이런 이대근들은 걸핏하면 핏대 세우고는 웃통 벗어제끼며 힘 자랑하거니와, 또 걸핏하면 도끼들고 장작을 패는 시늉을 하거나 오줌싸기를 해서 누가 더 오줌발을 멀리 보내느냐를 자랑한다. 이만큼이나 무식한 고고학이 무덤이 덩치가 커고, 부장품이 많을수록 그에 묻힌 이는 힘이 그만큼 세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고총高塚고고학이 그것이다. 이 고총고고학은 한중일, 특히 한국과 일본에 팽배해 그런 고총고분의 등장을 권력자의 등장로 간주하는가 하면, 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런 고총고분이 등장해야만 인류학에서 말하는 국가 state 단계로 접어든 증거로 간주한다. 이 고총고분을 대표하는 무덤이 경주 분지 일대에 밀집하는 4~6세기 신라의 적석목곽분이다. 이 고분은 덩치를 표식으로 삼는다.. 2021. 3. 11.
[墓와 廟] (1) 고총고분 등장이 권력자 등장 지표? 《봉분封墳(mound)의 등장》 동아시아 세계에서 무덤에 완연한 봉분을 쓰기는 공자 시대에 비로소 시작한다. 이건 고고학 성과로 볼 때도 명백하다. 이른바 고총고분高塚古墳의 등장이 모조리 공자 이후다. 이걸 고고학에서는 권력자의 등장, 중앙집권 국가의 등장 지표로 보는 견해가 압도적이나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조상신 숭배의 패턴이 변화한데 지나지 않는다. 봉분이란 무엇인가? 표식이다. 공자 이전 무덤은 묘墓다. 초두[艹]를 부수자로 쓴 데서 보듯 봉분이 없었고 있었다 해도 있는둥 마는둥했다. 《예기》인가 어디에 공자의 말로써 보이지 않는가? 공자는 지 애비 무덤이 어딘 줄도 몰랐다. 분墳이 아니라 墓였기 때문이다. 겨우 애비 무덤 찾아내곤 비로소 봉분을 만드니 이렇게 해서 고총고분은 비로소 탄생한다. .. 2019. 11. 3.
금관가야의 마지막 유산 김해 원지리 고분군(2) 조사 역사 우리는 이 블로그 전편을 통해 김해 원지리 고분군의 지리적 특징을 살피는 한편, 이것이 현재까지 알려진 금관가야 유일한 소위 고총고분(高塚古墳)임을 보았다. 고분군 속살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고분에 대한 발굴조사 역사를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원지리고분은 지금까지 딱 두 번 발굴이 있었다. 2017년 11월, 원지리고분군을 구성하는 고분 중에서도 봉분 규모가 가장 큰 M3호분을 긴급 조사했다. 조사단은 경상문화재연구원이었다. 그 결과 이 고분이 봉분 넓이 20m, 너비 15m, 높이 4m인 횡구식 석실분(橫口式石室墳)임을 확인하는 한편, 석실은 평면형태가 사다리꼴인 제형(梯形)이며, 규모는 길이 730㎝, 너비 145㎝, 깊이 154~157㎝로 드러났다. 극심한 도굴 피해를 본 것으로 드러난 .. 2019. 1. 12.
금관가야의 마지막 유산 김해 원지리 고분군(1) 그 지리 특징과 의미 金官加耶の最後の遺産 金海元支里古墳群(1)その地理特徴と意味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원지리 산 2-2번지를 표시한 다음 지도다. 이를 같은 지도 스카이뷰로 좀 더 자세히 들어가 보기로 한다. 이곳에 우리가 찾는 금관가야시대 무덤이 떼로 분포하는 까닭이다. 김해 시내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치우친 북쪽 지점에 위치함을 안다. 낙동강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동남쪽으로 크게 감돌아 흐르는 지점이다. 지금의 김해 시내는 그 동남쪽으로 평야지대에 자리잡았음을 본다. 원지리는 낙동강이 감돌아 흐르는 그 안쪽 산야 지대 한쪽 끄터러미를 차지했음을 확인한다. 뭐 딱 봐도 김해 시내를 중심으로 자리잡았을 왕조가 있다면, 그들에게 이곳은 북망산 자락이다. 좀 더 자세히 들어가니 김해 시내 서북쪽 귀퉁이 지점 계곡간을 들어간 지점임.. 2019. 1. 5.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