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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광3

딸을 과부로 만든 김유신(3) 원술이 희생되지 않은 이유 김유신 장자는 김삼광金三光이다. 그가 군직에 있었으면 당연히 그는 아버지를 따라 백제정벌전에 종군했어야 했지만, 이미 660년 이 전쟁 당시 김유신은 66세 노장이었고, 그 아들 삼광은 몇 살이었는지 확실치는 아니하나, 적어도 40대 중년이었을 것이다. 또 군대 쪽에서 활동한 흔적은 없고, 저 전쟁보다 6년이 지난 문무왕 6년(666)에는 천존의 아들 한림漢林과 더불어 나마로서,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한 상태였다고 하므로, 금수저로 일찍이 관직에 진출해 차곡차곡 공무원 경력을 쌓은 듯하다. 그는 분명 백제 정벌전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앞서 얘기했듯이 했다면 그가 가장 먼저 희생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유신은 곤혹에 처한 전세를 만회하고자 약발이 센 젊은 친구들만 골랐다. 그래서 부사령관들 자제를 골랐으니.. 2023. 12. 27.
사위이자 조카를 희생하고 김유신, 아들한텐 죽음을! (1) [추적, 한국사 그 순간 –8-] 백제 멸망케 한 황산벌 승리의 비결김유신, 조카이자 사위인 반굴 제물 삼아 계백 이기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7.01.08 00:44 | 513호 18면 『삼국사기』 권제47 열전 제7이 표제로 내세운 인물 중 김영윤(金令胤)의 전기는 실은 그를 중��historylibrary.net 앞서 나는 백제정벌전 신라군 총사령관 김유신이 어떤 전략으로 황산벌 계백군을 돌파했는지, 그 저력 중 하나로 피붙이를 먼저 희생함으로써 군사를 격발하는 전법을 썼다고 했거니와, 이게 쇼였을까? 백제의 명운을 결정한 이 전투에서 난관에 봉착한 김유신은 당시 수하에 있던 신라군 5만명 중 자신과 가장 가까운 혈육으로 사위이자 조카인 김반굴을 희생했다. 이 김반굴은 친동생 김흠순 아들로 관창.. 2020. 5. 26.
순경(順憬) 중대 신라 승려로, 신문왕 시대 무렵이 주된 활동연대일 것이다. 기원사 소속 승려다. 김유신 부하로 용맹함으로 이름을 떨친 열기가 김유신 아들로 당시 국정을 장악한 삼광한데 군태수를 달라했지만 거절당하자, 삼광을 설득해 삼년산군태수를 주게한다. 기타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열기 열전 : 뒤에 유신의 아들 삼광(三光)이 집정하자 렬기가 그에게 가서 군태수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렬기가 기원사(祇園寺) 승려 순경(順憬)에게 말하기를 “내 공이 큰데 군수를 달라 해서 받지 못했으니, 삼광이 자기 아버지가 죽었다고 나를 잊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순경이 삼광을 설득하니 삼광이 삼년산군(三年山郡) 태수를 주었다. 2018.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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