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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병3

남영동 다락엔 족제비, 아일랜드 다락엔 20억짜리 중국도자 82년간 다락방에 방치했던 중국 꽃병이 20억원 송고시간2020-12-30 12:19 김유아 기자 66만원 감정가에서 경매 시작 후 호가 급증 82년간 다락방에 방치했던 중국 꽃병이 20억원 | 연합뉴스82년간 다락방에 방치했던 중국 꽃병이 20억원, 김유아기자, 국제뉴스 (송고시간 2020-12-30 12:19)www.yna.co.kr 이런 일이 더러 보고되기는 하는데 첫째 거의 예외없이 한국이 아닌 외국이며 둘째 이것이 언제나 비극인데 언제나 남의 얘기라 내 얘기가 아니라는 점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그래 접때는 어디더라? 프랑스 어느 농가인지 평범한 가정집 부엌게 걸어둔 그림이 치마부에 그림으로 드러나면서 300억짜리 떼돈으로 둔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더니, 이건 어이한 셈인지 머나먼 저 아일랜드 땅에.. 2020. 12. 31.
[꽃병집 딸내미 이야기-후기] [꽃병집 딸내미 이야기-후기] 어릴 때 주변 사람들은 아빠를 ‘꽃병집 이사장’ 내지는 ‘어이! 꽃병!’ 이렇게 불렀다. 아빠는 누가 뭐래도 삼양동 꽃병집 사장님이었고, 나는 꽃병집 딸내미였다. 이제는 더 이상 누구도 아빠를 꽃병집으로 불러주지 않는다. 아마도 꽃병 공장을 그만둔지 30년이 넘었고, 다른 일을 했던 시간이 더 길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때 서울로 올라와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시작했으나, 아빠의 2-30대를 꽉 채웠던 그 시절이, 왜 내가 더 그리운건지는 잘 모르겠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아빠에게 그 시절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 잘 알 수 없다. 평소 무뚝뚝하고 표현을 잘 하지 않는 분이라 물어봐도 별 다른 말씀이 없다. 그치만 일전에 썼듯이 얼마 전까지 집에 최후의 꽃병이 남아 있.. 2020. 6. 26.
꽃병집 딸내미 이야기 [꽃병집 딸내미 이야기] 꽃병집 딸내미. 어릴적 나를 부르던 또 다른 이름이다. 동네에서 난 꽃병집 딸내미라고 불렸다. (오빠가 있었으나, 이상하게 오빠는 꽃병집 아들로 불리지 않았다.) 아빠는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서 태어났다. 당성 아래 제부도와 가까운 동네다. 3남2녀 중 장남인 아빠는 머리가 좋은 아이였으나 집안이 어려워 학교는 오래 다니지 못하셨고, 남들처럼 돈을 벌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으며 어찌어찌해서 ‘꽃병’을 만드는 기술을 배웠던 것 같다. 머리가 좋고 손재주가 있었던 아빠는 곧 이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아빠가 만들던 꽃병은 ‘백골’이라고 하는 플라스틱으로 기본 틀을 찍어내고 그 위에 옻칠을 하고 여러 도안으로 자개를 붙이는 방식이었다. 처음 정릉 아리랑고개 근처에서 공장을 시작했.. 2020.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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