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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휴2

이용휴가 김홍도 초상화를 보고서 김홍도 초상화에 부친 찬가〔對右菴金君像贊〕 남이 남의 초상화를 그리면 그 사람의 고움과 추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반면, 내가 나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면 내 주견에 제약을 받는다. 그런 까닭에 김군金君이 신군申君을 시켜 자기 얼굴을 그리도록 했다. 문인은 자기 글에 서문을 쓰지 않고, 명사는 자기 자신의 전기傳記를 쓰지 않는 옛날의 법에서 나온 생각이다.세상에서 재능있는 예술가로서 김군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예술가로서의 재능 때문에 김군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이제 김군의 초상화를 보니 영롱한 옥인 듯, 향기로운 난초인 듯하여 듣던 것보다 훨씬 나은 인물이다. 이야말로 그저 화가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온아溫雅한 군자로구나.그랬더니 김경오金景五와 정성중鄭成仲이 이렇게 말했다... 2018. 2. 26.
먼저 죽은 아우를 위한 형의 통곡 내가 이곳에서 영정조 때 활약한 이용휴(李用休.1708~1782)-이가환(李家煥.1742~1801) 부자의 글을 소개했거니와, 이번에는 이용휴가 두 살 아래 친동생 이병휴(李秉休.1710~1776)가 향년 67세로 먼저 세상을 떠나자 이를 애도하면서 지은 제문(祭文) 두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당시 용휴는 서울에 머물고, 동생은 고향인 충청도 덕산현(德山縣) 고산면(高山面) 장천리(長川里)라는 곳으로 낙향해 있다가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아우가 죽은지 한 달이 지났으나 병이 들고 길이 멀어 가지 못하고 제문을 지어 애도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이병휴는 字가 경협(景協)이요 號는 정산(貞山)이다. 성호 이익의 수제자로 역학(易學)과 예학(禮學)에 뛰어났다. 둘째 제문은 첫 대목에서 서울과 장천이 멀어 .. 2018.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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