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조선왕릉6

소위 성남 갈현동 사지寺址는 궁궐과 왕릉의 미니어처다 저 정체가 조금은 오리무중인 성남 갈현동 사지가 실상 조선왕릉 판박이임을 강조했거니와 그렇다면 왕궁과는 어떤가? 이 경복궁은 사람들이 오해하기 십상인데, 근정전은 그 위치가 북쪽 정중앙이다. 전체로 보면 그냥 정중앙인 듯하지만, 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하는 전면 흥례문 권력과 광화문이 공적 영역이며, 그 뒤편은 왕의 사적인 공간이라, 근정전은 북쪽 정중앙이다. 이 점을 혼동하면 안 된다!!! 하도 이 분야 연구를 독점한 고건축하는 친구들이 헛소리를 뇌까려 놔서 저런 오해를 어디에서부터 불식해야 하는지, 내가 왜 그들이 싸질러 놓은 똥을 치우는 일을 해야 하는지 분통이 터지지만, 근정전이 왜 북쪽 정중앙이라는 사실을 기자인 내가 앞장서 주창해야 하는가? 저 근정전을 중심으로 하는 왕의 공적 영역은 보다시피 .. 2023. 7. 31.
성남 갈현동 사지, 그 키워드는 조선왕릉에서 찾아야 한다 아들놈한테 쫓겨나 허울 뿐인 삶을 살다갔지만, 그래도 왕조 창업자라 해서 대접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왕릉이랍시고 해서 만든 구리 동구릉 내 이성계 무덤 건원릉이다. 항용 나는 조선왕릉을 생각할 적에 그것은 왕릉이며, 그런 까닭에 기본 구조가 실상 산 왕이 사는 공간인 궁궐과 똑같음을 주장했거니와, 나아가 그것은 동시대 사찰이라든가 성균관 향교와도 판박이라고 했다. 저 왕릉은 역시 시대별 넒나듦이 있지만, 그건 variation에 지나지 아니해서 그것을 관통하는 거대한 공통분모가 있어, 나는 그것을 그랜드 디자인이라 했다. 동아시아 그랜드디자인은 주인을 항상 북쪽 정중앙에 둔다. 왜? 그것이 바로 북극성 자리인 까닭이다. 그래서 이 북극성 주인은 언제나 남쪽을 바라보며 정좌해야 한다. 이를 남면南面이라 .. 2023. 7. 31.
무덤은 죽은 사람이 사는 집이다 나는 왕릉을 필두로 하는 무덤을 이해하는 관건은 이것이 알파요 오메가라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이와 관련한 그 어떤 강연회에서도 항용 이 말을 되풀이한다. 우리는 살아 생전에 그가 살던 공간을 '집'이라 하거니와, 그가 죽어서 사는 '집'이 무덤이다. 그리하여 무덤을 이해하는 첩경은 첫째도 둘째도 백만스물한번째도 '집'이다. 그런 까닭에 집이 이사를 하듯 무덤 역시 이사를 하기도 하며, 나아가 그것이 집이기에 그 구조 발상 이를 퉁쳐서 그랜드 디자인이라 하거니와, 그것은 항용 생전의 집과 일란성쌍둥이를 방불하는 이유다. 집은 넒나드는 대문이 있고, 마당이 있고, 앞채가 있고, 안채가 있듯이 무덤 역시 마찬가지다. 없는 집에는 대문이랄 것도 없고, 안채 뒤채 구별될 리가 없듯이 무덤 역시 없는 집은 콩가루.. 2022. 12. 3.
정자각과 정짜각 조선왕조 왕릉을 구성하는 건축물 중에 봉분 바로 전면 남쪽에다가 세운 건축물을 정자각이라 한다. 이곳은 제수를 설치해 놓고 제향하는 주축 공간이다. 이 건물을 정자각이라 부르는 까닭은 공중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한자 고무래 丁자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자 표기가 丁字閣이다. 한데 요즘 백이면 백명이 전부 '정자각'이라 발음하거니와, 개중에서도 정은 장음처럼 발음한다. 나 역시 의식하지 않으면 그러하다. 하지만 그 본래의 의미를 살린다면 "정짜각"이라 발음해야 한다. '정'은 짧게 발음한다. 정자각과 정짜각이 무에 상관이랴 하겠지만 한문 세대가 아닌 이들에게는 이는 매우 중대한 혼란을 초래하나니, 정자각을 거의 대부분이 정자형 건물로 오도하기 때문이다. (2016. 3. 2) 2021. 3. 4.
33rd WHC at Seville, Spain, 2009, where Joseon Royal Tombs inscribed on the World Heritage List The 33rd WHC (World Heritage Committee) held at Seville, Spain, 26 June 2009, where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were inscribed on the World Heritage List 2009년 6월,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올해로 조선왕릉 등재 10년. 이를 기념하는 여러 행사가 문화재청 주최로 열리는 모양이다. 당시 한국기자로는 유일하게 내가 참가했다. 당시엔 문화재청이나 외교부에서도 이에 즈음한 별도 사진촬영이나 동영상 자료를 남기지 않을 때라 이 당시 회의장 전경과 등재 순간 모습을 포착한 사진은 나밖에 촬영하지 않았다. 지금 첨부.. 2019. 6. 10.
왕릉 신도비는 왜 사라졌을까?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보인다. 태조(太祖) 건원릉(健元陵)의 비는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이 지은 것이요, 태종(太宗) 헌릉(獻陵)의 비는 문숙공(文肅公)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것이며, 세종 영릉(英陵)의 비는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것이다. 문종(文宗) 현릉(顯陵)에서는 세 능의 전례에 의하여 곧 비를 세우려고 공역(功役)을 이미 시작하였었는데, 어느 건의하는 자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행한 사적은 국사(國史)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사대부와 같이 신도비(神道碑)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중지하소서.” 하여, 이를 좇았다. 뒷날 영릉을 여주(驪州)로 옮김에 따라 또한 비를 매장하고 쓰지 않았으니, 본조[國朝] 능침(陵寢)에 비를.. 2018. 2. 19.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