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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3

광교산 자락 명당에서 생긴 일 수지구 광교산 자락, 이곳은 명당이었나보다. 여러 차례나 묘를 썼었다. 가경7년(1802년)명 지석이 나온 최기령의 묘는 정부인 천녕현씨와 증정부인 정읍이씨와의 합장묘다. 최기령(1737~1802)은 집안대대로 역관을 지냈는데 왜학을 전공했다. 지석은 두장인데 한장은 벼루를 재활용한 듯 하다. 여산군수 이공의 묘는 정부인 용인이씨와의 합장묘이다. 묘표에 의하면 순치4년(1647년)에 만들어졌으나, 토층 상황으로 보아 최기령의 묘 조성 이후에 현위치로 이장된 것으로 보인다. 좌우의 감실에서 백자 명기가 각각 17점, 20점이 출토되었는데 여자측 명기가 유색이나 굽의 상태로 보아 좀 더 고급품이다. 조사단에서는 17세기 관요 생산품으로 추정했다. 새로 조성된 체육공원 안에 있는 무덤이라 민원이 많았다고 한다.. 2020. 3. 17.
백제 무령왕릉 출토 지석과 매지권 판독 재고( 百濟武寧王陵出土誌石と買地券判讀再考) 백제 무령왕릉 출토 지석과 매지권 판독 재고百濟武寧王陵出土誌石と買地券判讀再考 김영관 忠北大學校 史學科 敎授 出典 : 《韓國古代史探究》 30, 韓國古代史探究學會, 2018, 12. 【抄錄】이 논문은 1971년 발굴된 이후 일치된 견해를 내지 못한 부령왕릉 출토 왕과 왕비의 지석과 매지권을 새롭게 판독하고 해석한 결과이다. 그 결과 무령왕 지석의 맨 마지막 글자 한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확하게 판독할 수 있었다. 무령왕 지석의 마지막 글자는 '穴‘, ‘冢’, ‘印’, ‘家’ 등으로 판독해 왔으나, ‘尔’로 판독했다. 무령왕비 지석 중 과거에 ‘大妃’로 판독했던 글자는 ‘太妃'임을 밝혔다. 매지권 중에서 "百濟斯麻" 다음에 오는 글자는 '王'이 아니라 '主'라는 것을 찾아냈다. 아울러 ‘訟' ‘詣' '詴' ‘.. 2019. 1. 6.
묘갈과 지석 죽은 이 생전 행적을 간단히 혹은 자세히 적어 무덤에 세우거나 묻는 문서로 묘갈墓碣과 지석誌石이 있다. 묘갈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비석이라, 봉분 바깥에 주로 돌판으로 만들어 세우거니와, 조선 후기에는 가끔 철판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에 견주어 지석은 광중壙中에 묻는 것으로, 돌판 혹은 도자기 혹은 심지어 벽돌을 쓰기도 한다. 둘을 혼동하는 이가 의외로 많아, 마침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다음 구절로 증거를 삼고자 한다. 세상에서 선조를 위하여 비명문(碑銘文)과 묘지문(墓誌文)을 지을 때는 반드시 글 잘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 청하는데, 혹 청하여도 얻지 못하거나 미루다 써주지 못하는 자도 많다. 비갈(碑碣)은 묘(墓) 밖에 세우고, 지석(誌石)은 묘 앞에 .. 2018.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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