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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곽묘12

국립박물관 온녕군 석곽 이야기 국립중앙박물관 산책로에 전시되어 있는 "온녕군 석곽" 이야기 입니다. 박물관 산책로에 전시된 태종의 일곱째 아들인 온녕군 (1407-1454) 석곽의 덮개돌은 쪼갠 흔적이 있는데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석곽을 무덤에 쓰는 것은 고려시대부터 계속 내려온 전통인데 회곽묘가 보급되기 전까지는 계속 이러한 제도가 고수되었습니다. 다만 석곽 개석이 너무 크고 무거워 사람이 다칠 수 있으니 태종은 개석을 반으로 쪼개어 쓰라는 명을 내립니다."상왕이 지병조사(知兵曹事) 곽존중(郭存中)을 보내어 임금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산릉의 석실(石室) 덮개가 넓고 두터워서 운반하기가 어려우니, 두 쪽으로 쪼개어 운반하기 쉽게 하고, 또 그렇게 하도록 법을 세워서 뒷날의 규례가 되도록 하라. 또 들으.. 2020. 10. 9.
[발굴조사보고서] 영성위 신광수, 화협옹주묘 《영성위 신광수·화협옹주묘》 고려문화재연구원, 2019 유적은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산 43-19번지 일원으로 주민인 경작중 발견한 석함 안에서 목제 말이 발견됨에 따라 주변 일대에 대한 긴급발굴조사를 시행 한 결과 조선시대 영조대왕의 공주인 화협옹주와 부군인 신광수의 묘가 확인되어 발굴조사되었다. 이 분묘는 이미 1970년대 이장된 분묘이나 주변에 매납한 유물이 들은 석함은 원 위치에 남겨진 관계로 인해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분묘의 묘제는 회곽묘로 부부가 합장된 모습이다. 묘역 바깥으로 곡장을 조성하였고, 무덤 남쪽에 석함과 회곽함이 각각 위치한다. 묘역의 규모는 길이 588cm, 너비 660cm이며 남서쪽 하단부는 이장으로 인해 결실된 모습이다. 두향은 N-62-E로 한강이 흐르는 서쪽을 바.. 2019. 8. 30.
이 땅의 도굴꾼들에게 고하는 통신(3) 다이너마이트는 필수 나는 일전에 일갈하기를 요즘 도굴꾼들에게 공부가 부족하며, 그리하여 혁혁한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도굴사 최악의 치욕들이 방방곡곡에서 빚어지고 있다고 했거니와, 그런 망신살이 조선시대 회곽묘灰槨墓 혹은 회격묘灰隔墓라는 무덤에도 미치고야 말았다. 2006.01.19 15:58:20서오릉 순창원 도굴 흔적 발견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사적 제198호) 경내 순창원順昌園서 전문도굴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도굴 미수 현장을 발견하고 현장조사를 실시했다고 19일 밝혔다. 순창원은 조선 13대 명종明宗의 원자元子 순회세자順懷世子(1551~1563)와 공회빈恭懷嬪 윤씨의 합장묘로, 문화재청에 따르면 18일 오전 발견당시 도굴범이 파낸 것으로 추정되는 봉분 뒤편이 다져.. 2019. 6. 21.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10): 에필로그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약속한 대로 조선시대 회곽묘 관련 선행 연구를 소개한다. 아래 연구에 필자의 글은 많은 영향을 받았다. 먼저 조선초기 상장의례의 변천은 정종수 선생의 중앙대 대학원 박사논문 "조선초기상장의례연구"에 자세하다. 이 논문은 회곽묘만 다룬 논문은 아니지만 조선 전기 주자가례를 도입하는 과정의 논란과 변천에 대해 서술하였다. 고려시대의 석실묘가 조선시대의 회곽묘로 변천해 가는 과정도 자세히 다루었다. 정종수 선생 다음으로 회곽묘의 변천과 관련하여 꼭 읽어봐야 할 책으로 김우림 선생의 "조선시대 사대부 무덤 이야기 (민속원)"를 권한다. 이 책이 나오기 전 김우림 선생의 글은 회곽묘의 변천을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할 글이었는데 이 책에 이전 주장이 알기 쉽게.. 2019. 6. 11.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9)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우리나라 조선시대 회곽묘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부분의 하나는 회곽묘 구조가 처음 조선 땅에 출현했을 때와 나중 시간이 많이 흘렀을 때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한백문화재연구원 방유리 선생의 "조선시대 회격묘 출토 유물의 수습과 보존" (야외고고학 제 7호)이나 김우림 선생의 단행본 "조선시대 사대부 무덤 이야기" (민속원)을 보면 이 부분이 비교적 자세하다. 김우림 선생 주장에 따르면 조선전기에는 "국조오례의"에 기술된 방식대로 회곽묘를 만들었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소위 "국조오례의" 방식의 회곽묘 제작 기법. 방유리 선생의 논문에서 전재하였다. 초기 방식의 회곽묘 제작 방식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묘광을 파고 그 위에 목곽-.. 2019. 6. 7.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8)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불교식 상장례를 타파하고 주자가 정리한 주자가례를 조선의 공식적인 매장 방식으로 채택했다고는 하지만 조선 바닥 그 누구도 회곽묘를 실제로 만드는 방법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는 이야기를 이미 했다. 회곽묘에 사용한 재료. 위에 보이는 재료 중에 석회·모래·황토를 삼물三物이라 부르는데 이것으로 섞어 관 주위에 다져두면 굳어 회곽이 된다. 마사토는 무덤 주변의 생토층을 상징한다. 회곽묘는 지배계층의 대 불교 "사상투쟁" 과정 중에 채택된 묘제이므로 회곽묘는 조선 계급사회의 가장 높은 지위의 사람부터 아래로 그 유행이 흘러 내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처음 회곽묘는 "국조오례의"의 흉례 "치장" 편에도 기술되어 있을 정도였으니까 국초에 이미.. 2019.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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