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파(弓巴)라고도 하며, 장보고(張保皐)로 잘 알려진 신라 말기 군인이자 정치가.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흥덕왕 : 3년(828) ...여름 4월에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은 성이 장씨(張氏)인데,<일명 보고(保皐)라고도 하였다.> 당나라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가 후에 본국으로 돌아와 왕을 찾아 뵙고 군사 1만 명으로 청해(淸海)를 지켰다.<청해는 지금[고려]의 완도(莞島)이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희강왕 : 2년(837) ...여름 4월에...아찬 우징이 그의 아버지 균정이 해를 입은 것에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했는데, 김명과 리홍 등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5월에 우징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 그의 처·자식과 함께 황산진(黃山津) 어구로 달아나, 배를 타고 청해진(淸海鎭) 대사(大使) 궁복(弓福)에게 가서 의탁하였다. 6월에 균정의 매부 아찬 례징(禮徵)이 아찬 량순(良順)과 함께 도망하여 우징에게 의지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민애왕 : 민애왕(閔哀王)이 왕위에 올랐다. ...2월에 김양(金陽)이 군사를 모아서 청해진에 들어가 우징(祐徵)을 찾아뵈었다. 아찬 우징은 청해진에 있으면서 김명이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문을 듣고 청해진 대사 궁복에게 말하였다.“김명(金明)은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이홍(利弘)은 임금과 아버지를 억울하게 죽였으니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자들이다. 바라건대 장군의 군사를 빌어서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해주시오.”궁복이 말하였다.“옛사람의 말에 의로움을 보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 하였으니, 내 비록 용렬하지만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드디어 군사 5천 명을 나누어 그의 친구 정년(鄭年)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고서는 이 화란(禍亂)을 평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겨울 12월에 김양이 평동장군(平東將軍)이 되어 염장(閻長), 장변(張弁), 정년(鄭年), 낙금(駱金), 장건영(張建榮), 이순행(李順行)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무주(武州) 철야현(鐵冶縣)에 도착하였다. 왕은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로 하여금 군사를 내어 맞서 싸우게 하였는데, [김양이] 낙금과 이순행을 보내 기병 3천 명으로 돌격하여 거의 다 죽이거나 상하게 하였다.2년(839) 봄 윤 정월에 밤낮 없이 행군하여 19일에 달벌(達伐) 언덕에 이르렀다. 왕은 군사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이찬 대흔(大昕)과 대아찬 윤린(允璘)·억훈(勛)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도록 하였다. 또 한번 싸움에 크게 이기니, 왕의 군사는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 이때 왕은 서쪽 교외 큰 나무 밑에 있었는데, 좌우 측근들이 모두 흩어지고 혼자 남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월유택(月遊宅)으로 달려 들어갔으나 군사들이 찾아내어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고 시호를 민애(閔哀)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신무왕 : 신무왕(神武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우징(祐徵)이니, 원성대왕 손자인 상대등 균정(均貞) 아들이고 희강왕 사촌 아우다. 례징(禮徵) 등이 궁중을 깨끗이 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했다.할아버지 이찬 례영(禮英)<효진(孝眞)이라고도 한다>을 혜강대왕(惠康大王)으로, 죽은 아버지를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추존했으며, 어머니 박씨 진교부인(眞矯夫人)을 헌목태후(憲穆太后)로 삼고, 아들 경응(慶膺)을 태자로 삼았다. 청해진 대사 궁복을 감의군사(感義軍使)에 봉하고 식읍 2천 호를 봉했다.
삼국사기 권 제44(열전 제4) 김양 열전 : 개성(開成) 2년(희강왕 2년: 837) 8월에 이르러 전 시중 우징(祐徵)이 남은 군사를 거두어 청해진(淸海鎭)으로 들어가 대사(大使) 궁복(弓福)과 결탁하여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양이 소식을 듣고 모사(謀士)와 병졸을 모집하여, 3년 2월에 바다를 건너 섬으로 들어가 우징을 만나보고 함께 거사할 것을 모의하였다. 3월에 강한 군사 5천 인으로써 무주(武州)[현재의 광주광역시]를 습격하여 성 아래에 이르니 주의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다시 진격하여 남원(南原)에 이르러 신라군과 마주 싸워 이겼으나, 우징은 군사들이 오래 피로하였으므로 다시 청해진으로 돌아가 병마(兵馬)를 휴양시키었다. 겨울에 혜성이 사방에 나타났는데, 광채나는 꼬리가 동쪽을 가리키니 여러 사람들이 하례하기를 “이것은 옛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펴며, 원수를 갚고 수치를 씻을 상서이다.” 하였다. 양은 평동장군(平東將軍)이라 일컫고, 12월에 다시 출동하니, 김양순(金亮詢)이 무주(鵡洲) 군사를 데리고 와서 합치고, 우징은 또 날래고 용맹한 염장(閻長)·장변(張弁)·정년(鄭年)·낙금(駱金)·장건영(張建榮)·이순행(李順行) 등 여섯 장수를 보내 병사를 통솔케 하니 군대의 위용이 대단히 성하였다. 북을 치며 행진하여 무주 철야현(鐵冶縣) 북천(北川)에 이르니 신라의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가 군사를 이끌고 역습하였다. 장군 낙금·이순행이 기병 3천으로써 저쪽 군중을 돌격해 들어가 거의 다 살상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1(신라본기 제11) 문성왕 : 문성왕(文聖王)이 왕위에 올랐다. ...8월에 크게 사면했다. 교(敎)를 내려 말했다.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궁복은 일찍이 군사로써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를 도와 앞 조정의 큰 적(賊)을 없앴으니 그 공적을 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궁복을]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아울러 장복(章服)을 내려 주었다. 7년(845) 봄 3월에 청해진대사 궁복(弓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둘째 왕비로 삼으려 했으나, 조정 신하들이 간(諫)하여 말했다. “부부의 도리는 사람의 큰 윤리입니다. 그러므로 하(夏)나라는 도산씨(塗山氏)로 인하여 흥하였고 은(殷)나라는 신씨(氏)로 인하여 번창하였으며, 주(周)나라는 포사(褒) 때문에 망하였고 진(晉)나라는 여희(驪姬) 때문에 어지러워졌습니다. 그러한 즉 나라의 존망은 여기에 있는 것이니 신중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궁복(弓福)은 섬사람인데, 그의 딸이 어찌 왕실의 배우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왕이 그 말에 따랐다. 8년(846) 봄에 청해진 궁복은 왕이 자기 딸을 맞아들이지 않았음을 원망해 청해진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장차 그를 토벌하자니 뜻하지 않을 우환이 있을까 두렵고 그냥 방치해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었으므로, 근심하고 염려하여 어떻게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무주(武州) 사람 염장(閻長)은 용감하고 굳세기로 당시에 소문이 나 있었는데, [그가] 와서 아뢰었다. “조정에서 다행히 저의 말을 들어 준다면, 저는 한 명의 병졸도 수고롭게 하지 않고 맨주먹을 가지고서 궁복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 왕이 그에 따랐다. 염장은 거짓으로 나라를 배반한 것처럼 꾸며 청해진에 투항했는데, 궁복은 장사(壯士)를 아꼈으므로 의심하지 않고 불러들여 높은 손님으로 삼고 그와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매우 즐거워하였다. 궁복이 술에 취하자 [염장이] 궁복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벤 후, 그 무리들을 불러 달래니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4(열전 제4) 장보고·정년 : 장보고(張保皐)<신라본기에는 궁복(弓福)으로 썼다>와 정년(鄭年)<연(年)은 련(連)으로도 쓰기도 한다>은 모두 신라 사람인데, 그들의 고향과 아버지 할아버지를 알 수 없다. 두 사람 모두 싸움을 잘하였는데, [정]년은 특히 바다 속에서 50리를 헤엄쳐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조금 뒤졌으나, [정]년이 [장]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장]보고는 연령으로, [정]년은 기예로 항상 서로 맞서 서로 아래에 들지 않으려 하였다. 두 사람이 당나라에 가서 무령군 소장(武寧軍小將)이 되어 말을 타고 창을 쓰는데, 대적할 자가 없었다. 후에 [장]보고가 귀국하여 대왕을 뵙고 아뢰었다.“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 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사람을 붙잡아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지금[고려] 완도(莞島)라 부르는 곳이다. 대왕이 [장]보고에게 [군사] 만 명을 주었다. 그 후 해상(海上)에서 우리나라 사람[鄕人]을 파는 자가 없었다. [장]보고가 이미 귀하게 되었을 때에 [정]년(年)은 [당나라에서] 관직에서 떨어져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사수(泗水)의 연수현(漣水縣)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수비하는 장수 풍원규(馮元規)에게 “내가 동으로 돌아가서 장보고에게 걸식하려 한다.”고 말하니, 원규가 말하였다. “그대와 [장]보고의 사이가 어떠한가? 어찌하여 가서 그 손에 죽으려 하는가?” 년(年)은 말하였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것은 전쟁에서 깨끗하게 죽느니만 못하다. 하물며 고향에 가서 죽는 것에 비하랴?”마침내 그곳을 떠나 장보고를 찾아 뵈니 술을 대접하며 극히 환대하였다.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왕이 시해되어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의 자리가 비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장]보고가 군사를 나누어 5천 명을 [정]년(年)에게 주며, [정]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대가 아니면 환난을 평정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정]년이 왕경에 들어가 반역자를 죽이고 왕을 세웠다. 왕이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으로 대신 청해를 지키게 하였다.<이것은 신라의 전기(傳記)와는 대단히 다르나 두목(杜牧)이 전(傳)을 지었으므로 둘 다 남겨 둔다.>사론(史論): 두목(杜牧)이 다음과 같이 썼다. 『천보(天寶) 연간,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에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 안사순(安思順)이 녹산(祿山)의 종제(從弟)인 까닭으로 해서 사사(賜死)되고, 조서를 내려 곽분양(郭汾陽)으로 대신케 하였는데, 열흘만에 다시 이임회(李臨淮)에게 조서를 내려 부절(符節)을 가지고 삭방(朔方)의 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동쪽으로 조(趙)·위(魏) 지방에 나가게 하였다. 안사순이 [절도사로 있었던] 때에는 [곽]분양과 임회가 모두 아문도장(牙門都將)으로 있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사이가 나빠서, 함께 한 상에서 음식을 먹더라도 항상 서로 흘겨보면서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곽]분양이 사순을 대신하게 되자, 임회는 도망하려 하였으나 결행하지 못하였다. [그때] 임회에게 조서(詔書)를 내리어 [곽]분양으로부터 병력을 절반 나누어 받아 동쪽으로 나가 토벌하게 하니, 임회가 [곽]분양에게 가서 ‘내 한 죽음은 달게 받겠으니 처자나 살려 주시오.’라고 청하였다. [곽]분양이 달려 내려가 [임회의] 손을 잡고 마루 위로 올라와 마주앉아 ‘지금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이 파천하였는데, 그대가 아니면 동쪽을 칠 수 없소. 어찌 사사로운 분한(忿恨)을 품을 때이겠소.’라고 말하였다. 작별하게 되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충의(忠義)로써 격려하였으니, 큰 도둑을 평정한 것은 실로 두 사람의 힘이었다.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을 알고, 또 그 재능이 일을 맡길 만한 것을 안 후에야 의심하지 않고 군사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평생에 분한을 쌓아 왔으니 그 마음 알기가 어렵고, 분노하면 반드시 [상대방의] 단점만 보이는 것이니 그 재능을 인정하기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 점에서 [장]보고와 [곽]분양의 어짊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정]년(年)이 [장]보고에게로 투탁할 때 ‘저는 귀하고 나는 천하니, 내가 자신을 낮추면 예전의 원한을 가지고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장]보고가 과연 죽이지 않았으니 이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이다. 임회가 [곽]분양에게 죽임을 청한 것도 또한 사람의 상정이었다. 또 [장]보고가 [정]년에게 임무를 맡긴 것은 자신이 결정한 것이며, [정]년은 또 추위와 굶주림 속에 있었으므로 감동되기 쉬운 일이었고, [곽]분양과 임회는 평생을 대립하였지만, 임회에 대한 명은 천자로부터 나온 것이었으니, 장보고에 비하면 [곽]분양이 [결단하기가] 더 용이하였다. 이런 상황은 성현도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일을 이루거나 그르치는 분기점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착하고 의로운 마음[仁義]이 잡정(雜情)과 함께 섞이어, 잡정이 많아 이기면 인의가 없어지고, 인의가 많아 이기면 잡정이 사그라진다. 저 두 사람은 인의가 마음을 이미 주도하였고, 여기에 다시 자질이 밝았기 때문에 마침내 공을 이룬 것이다. 세간에서는 주공(周公)·소공(召公)을 백대의 스승으로 일컫고 있지만, 주공이 어린아이를 보좌할 때에는 소공도 의심하였다. 주공의 거룩함과 소공의 어짊으로, 젊어서 문왕(文王)을 섬기고 늙어서 무왕(武王)을 도와 능히 천하를 평정하였지만, 주공의 마음을 소공도 알지 못하였다. 진실로 인의의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밝은 자질이 아니면 비록 소공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그만 못한 사람에 있어서랴? 속담에 ‘나라에 한 사람만 있어도 그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대저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망할 때를 당하여 어진 사람이 쓰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로 [어진 사람을] 쓴다면 한 사람으로도 족할 것이다.』 송기(宋祁)가 썼다. 『아아! 원한으로써 서로 질투하지 않고 나라의 우환을 앞세운 경우로는 진(晉)나라에 기해(祁奚)가 있었고, 당(唐)나라에 [곽]분양과 [장]보고가 있었다. 누가 동이(東夷)에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인가?』
삼국유사 제2권 기이 2 신무대왕과 염장(閻長)과 궁파(弓巴) : 제45대 신무대왕(神武大王)이 왕위(王位)에 오르기 전에 협사(俠士) 궁파(弓巴)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이 세상을 같이 살아나갈 수 없는 원수가 있다. 네가 만일 나를 위해서 이를 없애 준다면 내가 왕위에 오른 뒤에 네 딸을 맞아 왕비로 삼겠다." 궁파가 이를 허락하니 마음과 힘을 같이하여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가서 그 일을 성취하였다. 그 뒤에 이미 왕위를 빼앗고 궁파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매 여러 신하들이 힘써 간한다. "궁파는 아주 미천한 사람이오니 왕께서 그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왕은 그 말을 따랐다. 그 때 궁파는 청해진(淸海鎭)에서 진(鎭)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기는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장군 염장(閻長)이 이 말을 듣고 왕께 아뢰었다. "궁파가 장차 충성스럽지 못한 일을 하려 하오니 소신이 가서 이를 제거하겠습니다." 왕은 기뻐하여 이를 허락했다. 염장은 왕의 뜻을 받아 청해진으로 가서 길을 안내하는 자를 통해서 말했다. "나는 왕에게 조그만 원망이 있어서 그대에게 의탁하여 몸과 목숨을 보전하려 하오." 궁파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했다. "너희들이 왕에게 간(諫)해서 내 딸을 폐(廢)하고 어찌 나를 보려 하느냐?" 염장이 다시 사람을 통해서 말했다. "그것은 여러 신하들이 간한 것이고 나는 그 일에 간여하지 않았으니 그대는 나를 혐의치 마십시오." 궁파는 이 말을 듣고 청사(廳舍)로 그를 불러들여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가?" "왕의 뜻을 거슬린 일이 있기에 그대의 막하(幕下)에 의탁해서 해(害)를 면할까 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오."하고 궁파는 술자리를 마련하여 무척 기뻐했다. 이에 염장은 궁파의 긴 칼을 빼어 궁파를 베어 죽이자 휘하(麾下)에 있던 군사들은 놀라서 모두 땅에 엎드린다. 이에 염장은 이들을 이끌고 서울로 와서 왕에게 복명(復命)했다. "이미 궁파를 베어 죽였습니다." 왕은 기뻐해서 그에게 상을 내리고 아간(阿干) 벼슬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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