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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김룡춘(金龍春)

by taeshik.kim 2018.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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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지왕 아들이며, 룡수(龍樹) 동생이다. 형이 죽자 그 아들 김춘추를 양자로 거두어 돌보았다. 죽은 뒤 문흥대왕에 추봉됐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4 진평왕 : 51년(629)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룡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했다. 고구려인이 성을 나와 진을 벌려 치니 군세가 매우 성해 우리군사가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 싸울 마음이 전혀 없었다. 유신이 말했다. "제가 듣건대 ‘옷깃을 잡고 흔들면 가죽옷이 바로 펴지고 벼리를 끌어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 했습니다. 제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이에 말을 타고 칼을 빼들고는 적진을 향해 곧바로 나아가 세 번 들어가고 세 번 나옴에 매번 들어갈 때마다 장수 목을 베고 혹은 깃발을 뽑았다. 뭇 군사가 승세에 따라 북을 치며 진격해 5천여 명을 목베어 죽이니, 이에 그 성이 항복했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선덕왕 : 4년(635) 당이 사신을 보내 부절(符節)을 가지고 왕을 주국(柱國)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에 책봉해 아버지 봉작(封爵)을 잇게 했다. 영묘사(靈廟寺)가 완성됐다. 겨울 10월에 이찬 수품(水品)과 룡수(龍樹)<룡춘(龍春)이라고도 한다>를 보내 주·현을 두루 돌며 위문케 했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春秋)이고 진지왕 아들인 이찬 룡춘(龍春)<룡수(龍樹)라고도 했다>의 아들이다.<당서(唐書)에는 진덕(眞德)의 동생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진평왕 딸이고 왕비 문명부인(文明夫人)은 각찬(角) 서현의 딸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이름이 춘추(春秋)이니 김씨다. 진지왕(眞智王) 아들인 룡춘(龍春) 탁문흥갈문왕(卓文興葛文王) 아들이다. 룡춘(龍春)은 룡수(龍樹)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니 시호가 문정태후(文貞太后)이니, 진평왕 딸이다. 비는 훈제부인(訓帝夫人)이니 시호는 문명왕후(文明王后)인데 유신(庾信)의 동생이다. 어릴 적 이름은 문희(文熙)다. 갑인년에 즉위해 7년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제8(신라본기 8) 신문왕 : 7년(687)...여름 4월에 음성서(音聲署) 장관을 고쳐 경(卿)이라 했다. 대신을 조묘(祖廟)에 보내 제사를 올리고 아뢰었다. “왕 아무개는 머리 숙여 재배(再拜)하고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진지대왕(眞智大王).문흥대왕(文興大王).태종대왕(太宗大王).문무대왕(文武大王) 영전에 아룁니다. 저는 재주와 덕이 없이 숭고한 유업을 계승해 지킴에 자나깨나 걱정하고 애쓰느라 편안하게 지낼 겨를이 없었습니다. 종묘의 돌보심과 하늘과 땅이 내리는 복에 힘입어 사방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화목해,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은 보물을 실어다 바치고, 형벌이 밝고 송사(訟事)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요즈음 임금으로서 할 바 도(道)를 잃고 의리가 하늘의 뜻에 어그러졌음인지, 별의 형상에 괴변(怪變)이 나타나고 해는 빛을 잃고 침침해지니 몸이 벌벌 떨려 마치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삼가 아무 관직에 있는 아무개를 보내 변변치 못한 것을 차려 놓고 살아 계신 듯한[如在] 영혼 앞에 정성을 올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미미한 정성을 밝게 살피시고 하찮은 이 몸을 불쌍히 여기시어 사철 기후를 순조롭게 하시고 오사(五事)의 징후에 허물이 없게 하시며 곡식이 잘되고 질병을 없게 하며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하고 예의를 갖추며 안팎이 편안하고 도적이 사라지며 넉넉한 것을 자손들에게 남겨 길이 많은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삼가 아룁니다”. 

삼국사기 권 제41(열전 제1) 김유신上 : 건복 46년 기축(진평왕 51년: 629) 가을 8월에 왕이 이찬(伊飡) 임말리(任末里), 파진찬(波珍飡) 용춘(龍春)·백룡(白龍), 소판(蘇判) 대인(大因)·서현(舒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출동시켜 이를 맞아 치니, 우리편이 불리하여 죽은 자가 많고, 뭇 사람들의 마음이 꺾이어 다시 싸울 마음이 없었다. 유신이 그때 중당 당주(中幢幢主)였었는데,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우리 군사가 패하였습니다. 제가 평생 충효스럽게 살겠다고 기약하였으니, 전쟁에 임하여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듣건대 ‘옷깃을 들면 가죽옷[]이 펴지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 하니, 제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이에 말을 타고 칼을 빼어 들어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에 들락날락하면서 장군의 머리를 베어 들고 돌아왔다. 우리 군사들이 보고, 이기는 기세를 타서 맹렬히 공격하여, 5천여 명을 목베고 1천 명을 사로잡으니, 성 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삼국유사 권2 기이 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은 이름이 춘추(春秋)이고 성(姓)은 김씨(金氏)다.  룡수(龍樹. 룡춘<龍春>이라고도 한다) 각간(角干)이니, 추봉(追封)된 문흥대왕(文興大王)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며, 비(妃)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이니 곧 유신공(庾信公) 끝누이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황룡사(皇龍寺) 구층탑(九層塔) : 정관(貞觀) 17년 계묘(癸卯; 643)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佛經)·불상(佛像)·가사(袈裟)·폐백(幣帛)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 세울 일을 임금에게 아뢰자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 일을 의논하니 신하들은 말하기를, "백제에서 공장이를 청해 데려와야 되겠습니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청해 오게 했다. 이리하여 아비지(阿非知)라고 하는 공장이가 명을 받고 와서 나무와 돌을 재고, 이간(伊干) 용춘(龍春; 혹은 용수龍樹)이 그 역사를 주관하는데 거느리고 일한 소장(小匠)들은 200 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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