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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이야기/마왕퇴와 전국 초묘 미라

[마왕퇴와 그 이웃-2] 그리고 楚-漢의 시대 (2)

by 초야잠필 2025.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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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는 전한시대 무덤이다. 

정확히는 유방이 천하를 제패하고 한나라를 건국했을 무렵

그를 따라다니던 공신 중 별 볼일 없던 리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보다 훨씬 대단한 건국 공신들도 유방과 여후에 의해 모가지가 팍팍 날아가던 무렵

비록 한나라의 외곽이기는 해도 장사 지역에 자기 군국도 하나 받아 열후가 되고 

그 자손까지 봉작이 이어져 거의 백년 가까이 유지한 집안 일가 무덤이다. 
 

 
마왕퇴라고 하지만 무덤 하나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모두 세 개 무덤을 총칭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 무덤은 조사한 순서에 따라 각각 1호, 2호, 3호 무덤이라 부른다. 

이 무덤은 발견은 1971년 12월에 있었지만 실제 발굴이 진행된 것은 1972년으로 (1호 무덤)

2호와 3호 무덤은 1973, 1974년에 각각 시행되어 약 3년만에 현지 발굴이 모두 끝났다. 

그 중 1호 무덤은 가장 먼저 발견된 것으로 내부에서는 보존상태가 탁월한 유물과 함께 미라가 발견되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마왕퇴 무덤이라고 하면 미라가 출토한 1호 무덤과 각종 문헌자료를 쏟아낸 3호 무덤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2호 무덤은 도굴 피해가 커서 중요성이 그다지 부각하지 않는다. 

마왕퇴 무덤은 아직 중국의 고고학 및 관련 과학 수준이 일천할 때 발굴된 것이지만 

발굴과 연구자체의 성과는 실패라고 보기 어렵다. 

당시로서는 중국이 끌어내어 쓸 수 있는 모든 가용자원이 총동원된 것이나 다름 없으며

이 당시는 아직도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진행 중인 시대였는데 

그 와중에도 중미관계가 정상화하고 대륙이 중화민국 대신에 유엔 안보리에 출석하는 등

2차대전 이후 줄곧 이어지던 냉전의 얼음이 녹고 데탕트 기운이 완연하던 시대였다. 

한국은 이 무렵 10월 유신 (1972년)이 있었고 박정희 정권 후반기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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