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READING HISTORY83

낙랑군 속현 지명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서漢書 권 제28下는 지리지地理志 第八上이라, 이에는 아래와 같은 전한시대에 설치한 郡별로 그 호수와 인구, 그리고 속현 명단이 저록됐거니와, 遼西郡 : 戶七萬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萬二千三百二十五。縣十四:且慮,海陽,新安平,柳城,令支,肥如,賓從,交黎,陽樂,狐蘇,徒河,文成,臨渝,絫。 遼東郡 : 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縣十八:襄平,新昌,無慮,望平,房,候城,遼隊,遼陽,險瀆,居就,高顯,安市,武次,平郭,西安平,文,番汗,沓氏。 玄菟郡 : 戶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縣三:高句驪,上殷台,西蓋馬。 樂浪郡 : 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縣二十五:朝鮮,俨邯,浿水,含資,黏蟬,遂成,增地,帶方,駟望,海冥,列口,長岑,屯有,昭明,鏤方,提奚,渾彌,吞列,東傥,不而,蠶台,華麗,邪頭昧,前莫,夫租。.. 2018. 2. 25.
용재총화가 말하는 면신례 백태 용재(慵齋) 성현(成俔·1439~1504)의 불후한 야담필기류인 《용재총화(慵齋叢話)》 에 보이는 각종 공무원 신참 신고식 백태(百態)다. 신참 신고식을 면신례(免新禮)라 하니, 말 그대로 아마추어 티를 벗는 의식이라는 뜻이다. 그 폐단을 극력 주창하면서 그 개선을 촉구한 율곡 이이의 글은 이 블로그에 따로 있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제1권○ 옛날에 신입자(新入者 새로 문과에 등과한 사람)를 제재한 것은 호사(豪士)의 기를 꺾고 상하의 구별을 엄격히 하여 규칙에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바치는 물품이 물고기면 용(龍)이라 하고, 닭이면 봉(鳳)이라 하였으며, 술은 청주이면 성(聖)이라 하며, 탁주이면 현(賢)이라 하여 그 수량도 제한이 있었다. 처음으로 관직에 나가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10여 일을.. 2018. 2. 20.
내가 어우동이랑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어우동 이야기는 사건 발생 당대에 이미 유명했다. 그 무렵 다른 사건이 있었다. 성현의 용재총화 제6권에 보이는 이야기다. 손님을 거절하였다는 이유로 볼기를 맞은 수원 기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어우동(於宇同)은 음란한 것을 좋아하여 죄를 얻었는데, 나는 음란하지 않다 하여 죄를 얻었으니, 조정의 법이 어찌 이처럼 같지 아니한가.”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옳은 말이라 하였다. 매우 간단한 이 증언을 우리가 주시해야 하는 까닭은 어우동 이야기가 이미 누항까지 퍼졌다는 것이며, 나아가 그것이 기생 사회에는 어우동 이야기가 이미 하나의 성전으로 군림하기 시작한 증좌라는 사실이다. 이 예화에서 수청을 거절하는 관 소속 기생은 그에 대한 처벌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한데 그 처벌에 대한 해당 기생의.. 2018. 2. 19.
내가 데리고 산 기생, 20년만에 과부되어 다시 만나고파 아무리 첩이라 해도, 그가 어떤 남성과 과거에 살았건 그건 전연 흠이 되지 않았다. 그가 기생이었다 해서, 그것이 그를 첩으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떤 주저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이것이 조선사회다. 어떤 점에서는 요즘의 한국사회 성관념과 비교해도 훨씬 혁신적이었고, 훨씬 선진적인 면도 있었다. 과거를 묻지 않았다.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다음 이야기는 그런 사정을 증거한다. 가정 경신년 겨울에 호남 지방 감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신유년 봄에 병으로 전주에 머물며 조리하던 중에 기생 금개(今介)와 함께 산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금개의 나이 겨우 20살인데, 성질이 약삭빠르고 영리하였다. 전주에서 돌아올 때 정오가 되어 우정(郵亭)에서 쉬고 있는데, 기생 또한.. 2018. 2. 19.
조선시대가 성 억압 사회? 기생이라고 정조 관념이 없다고 나는 이리 안이하게 보지는 않는다. 기생은 으레 그런 존재이기에 이를 받아들이는 남자들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고 보지도 않는다. 아무래도 우리가 배운 조선시대 통념, 성관념은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나는 본다. 물론 그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성 억압이 외려 기독교 시대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본다. 조선시대? 지금 기준으로 봐도 성 개방 시대였다. 혹자는 양반 사대부가에서만 성 억압 윤리가 통용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 보지 않는다. 저 밑에서는 욕망이 꿈틀대는데 양반 사대부가만 그렇지 않았다고? 나는 그리 보지 않는다. 뭐가 통념이 잘못되었다.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이야기다. 두 번.. 2018. 2. 19.
노익장 과시, 정력 자랑 여성이야 폐경은 곧 생산 단절이지만, 남자는 그렇지 않아 기억에 피카소는 90에 자식을 봤다고 안다. 전통시대로 넘어가면 흔치는 않으나 70~80에도 가끔 후사를 생산했다. 당시 세태에서는 기록적인 장수를 한 심수경(沈守慶․1516~1599)은 건강관리를 잘했는지, 아니면 정력에 셌는지, 75에 자식을 낳고, 80에 다시 자식을 두었다. 그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는 이에 읽힌 이야기가 보인다. 뭐 어투는 남사스럽다는 것인데, 속내는 볼짝없이 자랑이다. 한데 저리 낳은 서얼들은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비가 곧 죽었으니, 그 보호를 받았을리도 없으니, 제대로 자랐다면 울분을 삼키지 않았을까 한다. 내가 75세에 아들을 낳고 81세에 또 아들을 낳았으니, 모두 비첩의 몸에서 태어났다. 80세에 자식을.. 2018. 2. 19.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