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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역법2

저들은 어떻게 그렇게 돈이 많았던가 영조 25년 4월 23일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지난번 의 글 뜻을 물으셨을 때, 신이 형관刑官으로서 비록 감히 우러러 진달陳達할 수 없었사옵니다만, 지금 종용從容하오시니 감히 이를 우러러 진달하옵니다. 고려의 역사야 비록 볼 만한 것이 없지만, 쌓아놓은 재물은 넉넉했사옵니다. 그 때에 팔관회八關會 ‧ 연등회燃燈會를 하면 한 번 쓰는 바가 몇 만 석石 아래로는 조금도 내려가지 않았사오니, 우리나라의 재력財力을 그때와 견주면 애통하다 이를 만합니다.”라 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길, “그렇도다." 啓禧曰, 俄者麗史文義時, 臣以刑官, 雖不敢仰陳, 而今則從容, 敢此仰達矣。麗史, 雖無可觀, 而蓄積則有裕。其時八關燃燈之會, 一次所費, 少不下累萬餘石, 我國財力, 比之其時, 則.. 2021. 10. 6.
영조 자신이 내세운 재위 50년의 치적 6가지 앞 사진은 '어제문업(御製問業)'이라, 영조친필이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하는데, 관리처일 뿐이고 실제 주인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원래 관리처는 문화재관리국, 즉 문화재청이 위탁관리케 한 것이다. 제왕은 모든 점에서 모범이 되어야했기에, 비단 영조만이 아니라 조선 역대왕 글씨를 보면 대체로 서예미랑은 전연 거리가 멀어, 멋을 부리지 아니했으니, 그런 점에서 영조 역시 어긋남이 없다. 가끔 글씨 잘 쓰는 임금놈이 있는데, 틀림없이 제왕 교육을 받지 아니하고, 탱자탱자 놀다가 엎혀서 느닷없이 왕이 된 경우에 그러하다. 내 보기엔 조선왕조 500년사에서 영조는 세종에 버금하는 성군이다. 그의 손자 정조가 비길 바가 아니다. 나아가 단군조선 이래 가장 노회한 군주로 나는 서슴없이 영조를 꼽는다. 이.. 2019.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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