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362 2015년 충추 호암동 초기철기시대 무덤 발굴현장 충주 발굴현장…통나무 목관 쓴 초기철기시대 지역수장 송고 2015-01-19 14:43 사방 조망하는 곳에 묘자리·청동기 다량 부장(충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전날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은 발굴현장은 온통 진흙이었다. 겨울바람이 거센 가운데 취재진과 취재차량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충주시가 전국체전 개최를 위해 종합스포츠타운 건설을 추진 중인 호암동 628-5 일원 발굴현장은 인근에 달천이라는 강이 흐르면서 형성한 충적지대가 드넓게 펼쳐졌다. 이런 곳에서 한국고고학계에서는 오랜만에 낭보를 들려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중원문화재연구원(원장 강경숙)이 지난해부터 이곳을 발굴조사한 결과 기원전 3세기 이래 기원전후에 이르는 이른바 초기철기시대 무덤 3곳 중 1호 고분이라.. 2025. 3. 23. 그때 그 시절 한 장면 두어 번 써먹기는 했지만 막상 내가 필요할 때는 도대체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마침 페이스북 과거의 오늘에 저 장면이 포착되는지라 이참에 블로그에 탑재해 저장고로 삼는다. 촬영시점을 보니 2011년 7월 4일이라우리가 미국 독립기념일을 기념할 리도 없거니와, 아마도 이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무슨 행사가 있었던 모양이라 저 사진에 등장하는 이원복 선생이 학예실장 시절 아니었나 한다.사진 왼쪽부터 차례로 민병찬 강대규 이광표 이원복 김태식이며, 김태식 뒤에 가린 분이 유병하 선생이다. 물론 다 현직을 떠났으니 당시 동아일보 기자 이광표 씨만 이후 대학으로 옮겨 지금도 교수질한다. 이 사진을 누가 찍었는지 모르겠는데 찍은 현장, 그리고 구도, 나아가 소재로 보아 민병훈 선생 아니었을까 한다. 이 양반이 저런.. 2025. 3. 23.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35) 김영나 시대의 박물관(3) 국박 뿌리를 흔들다 김영나의 박물관장 재임 5년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여러 시각이 있겠지만 나는 ‘박물관의 미술관화’ 이것 하나로 축약할 수 있다고 본다. 더욱 정확히는 재임 기간 내내 그는 국립박물관, 특히 중앙박물관을 서양미술관으로 바꾸려고 했다. 실제 전시회 중에서도 박물관이 총력을 쏟아부은 소위 블록버스터 기획전은 서양미술을 주제 혹은 소재로 하는 일이 많았으며, 전시 환경 역시 그에 맞추어 개편하고자 했다. 이는 결국 박물관의 정체성 문제를 불러일으켰으며, 나아가 유사 문화기관에서의 비난을 야기했다. 그의 치하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가람미술관 혹은 서울시립미술관이 아니냐는 비판을 사기도 했다. 나는 그가 추진한 서양미술관화에 대한 어떤 감정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옳다 그르다 하는 관점에서 논하고 싶지는 않다.. 2025. 3. 14.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35) 김영나 시대의 박물관 (2) 그와 정형민 그렇다면 정부는 왜 굳이 두 자매 중에서도 김영나를 택했을까? 확인된 바는 없지만, 김리나의 나이가 문제였다는 지적이 있다. 김영나가 관장에 취임했을 때 이미 김리나는 홍익대를 정년퇴임한 상태였다. 더불어 그는 같은 문화부 산하기관으로서 근간의 기능에서는 같다고밖에 볼 수 없는 국립현대미술관장 정형민과도 여러모로 비교되곤 했다. 김영나보다 1년 뒤인 2012년 1월 공모 형식을 빌려 미술관장에 취임한 정형민은 서양미술사를 배우기도 했지만 미시간대학교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석·박사를 동양미술사로 했다. 같은 서울대 교수로서 그 박물관장을 지낸 김영나에 견주어 정형민은 이 대학 미술관장을 역임했다. 출신은 다르다. 경기여고 출신 김영나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국 뮬렌버그 대학과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학부와 석박.. 2025. 3. 14. [그 시절 무령왕릉 공부](1) 경복궁 국립문화재연구소 한때 무령왕릉을 제대로 공부 혹은 이해하고 싶다 해서 닥치는 대로 자료를 긁어 모으던 시절이 있었다.그때 인터넷 시대에 막 돌입하기는 했지만 지금과는 사정이 또 왕청나게 달라 근간은 필요한 자료 논문 자료집은 일일이 도서관 가서 대출하거나 복사 혹은 스캔을 하던 시대였다. 그 무렵 자주 이용한 데가 국립문화재연구소, 지금의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자료실이었다. 난 여기 가서 살다시피 했다. 물론 기자질을 해야 했으니 여가엔 이 자료실을 그만큼 자주 이용했다는 의미다.당시 자료실장이 성함이 각중에 안 떠오르는데 안 머라 하던 분이었으니 이 즈음 퇴임했거나 앞두고 있을 것이다.참 신세 많이 진 분이었다.그 연구소가 지금의 경복궁 안 국립고궁박물관 북쪽 인접 지점에 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대전으로 내려가면서 건물.. 2025. 3. 12. 문순득을 기폭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2년 특별전 편집자주) 문순득 관련 논급을 오늘 다른 분 글을 통해 접하다가 문득 그 옛날 내가 기자시절 쓴 기사가 생각나 검색해서 다시 전재한다. 작성시점을 보니 벌써 13년이나 흘렀다. 2012년 기사다. 당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지금의 국립해양유산연구소가 주최한 이 특별전이 중요한 이유는 이후 관련 연구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물론 선행 연구를 발판으로 저 기획을 하게 되었지만 저 일은 문순득을 대중의 장으로 불러낸 단초였다.이 의미를 부각해야 한다. *** 부활하는 흑산도 홍어장수 문순득 송고 2012-09-19 10:58 국립애양문화재연구소 특별전(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홍어장수 문순득文淳得(1777~1847)은 1802년 신안군 흑산도 인근 바다를 표류하다가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를 거쳐.. 2025. 3. 7. 이전 1 2 3 4 ··· 6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