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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53

[무령왕릉이 봉착한 최대 난제 둘] (4)  미완성으로 끝난 죽음 그렇다면 왜 무령왕릉은 개봉 당시 부부 위치가 바뀌었고, 머리는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두었는가? 이 의문은 실은 역발상으로 간단히 풀리는데, 그것이 죽음의 경우는 반대지만, 살아있는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무령왕과 그의 왕비 모두 살아있는 모습으로 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찌하여 저 부부는 살아있는 모습으로 형상화했는가? 그 해답은 빈殯에 있다. 더 간단히 말해 빈소 그대로의 모습인 까닭이다. 앞서 나는 동아시아 전통 장송 관념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군주건 나발이건 두 번의 죽음을 맞이하며 이 두 번의 죽음을 거쳐야 비로소 죽음이 완성한다는 말을 했다. 예서 관건이 빈殯이다. 이 빈이란 더 간단히 말하면 생물학적 죽음과 상징으로서의 죽음이 걸치는 기간을 말한다. 완전한 죽음은 저 두.. 2024. 3. 27.
[무령왕릉이 봉착한 최대 난제 둘] (2) 펀더멘털로부터의 이탈 혹자는 이런 반론을 가할지도 모르겠다. 저 무령왕 시대에 백제가 그렇게 예제禮制를 철저하게 관철하려 했을까? 그러니 이런저런 절차 생략하고 했을 것이니, 남녀 위치가 바뀐 것도, 머리를 남쪽으로 둔 것도 하등 이상할 점은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무령왕릉은 우리한테 주어진 자료에 의하는 한, 예제가 규정한 그대로 실현하려 했다. 3년상만 해도 그것이 공자에서 비롯하지만 그건 책에서나 있는 이야기일 뿐이요, 실제는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니 해서 각종 편법이 판을 쳤으니, 이는 무엇보다 책 혹은 이상이 규정하는 절차일 뿐이요 그것을 현실 세계에서 그대로 관철하기에는 적지 않은 애로가 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령왕릉은 희한하게도 곧이곧대로 이 예제를 그대로 실현하려 했다. 당시 동아시아 어디에서도 실현하려 하지 .. 2024. 3. 25.
발굴 두 달 뒤에 나온 무령왕릉 조사 중간보고(71년 9월) 출전 : 박물관신문 제15호 (1971년 09월) 무녕왕릉 조사 중간보고 (종합 조사단 작성) 고고 및 기초조사반 보고 1, 출토 유물의 분류와 목록작성 발굴과정(發掘過程)에 있어서 출토상태에 따라 구분하여 채집한 유물의 수량은 막대하였다. 이것을 품목별로 카아드를 작성하고 정리하여 분류한 결과 그 수량은 별표 목록과 같이 88종으로서 총 2천5백61점에 달하였다. 부장품(副葬品)의 대다수는 장신구류(裝身具類)에 속하며 52종 2천4백96점을 차지하고 있다. 이 장신구류는 또한 대부분이 금·은의 귀금속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중에서 금제품은 30종 2천2백21점의 다수를 차지한다. 은과 함께 금을 부분적으로 사용한 유물의 수도 포함시키면 그 수와 종류는 훨씬 증가된다. 이 왕릉의 부장품을 제작하기 위하여 소.. 2024. 3. 5.
공주 송산리고분 1~4호분 발굴이 불요불급한가? 근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이라고 이름을 바꾼 공주 송산리고분군 소재 백제시대 왕릉급 무덤 중 1~4호분이라고 명명한 데 네 곳을 파기로 하고는, 그 현장을 2023 대백제전과 연계해 공개하기로 했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한데 나는 이 발굴조사 계획을 의심한다. 첫째, 무덤을 발굴해야 할 만큼 불요불급한가? 둘째, 그 이유는 납득을 할 만한가? 크게 두 가지 까닭에 기반해 접근한다. 이번 조사 계획과 관련해 문화재청 혹은 부여연구소는 이렇게 말한다. 이번에 공개하는 1~4호분은 무령왕릉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일제강점기 공주 고등보통학교 교사였던 가루베지온(軽部慈恩)이 1927년 3월에 처음 확인한 것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보고했고, 같은 해 10월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 2023. 9. 30.
《직설 무령왕릉 추보》 (2) 독자가 없는 텍스트에서 찾은 민족주체성 이건 내가 졸저 《직설 무령왕릉》에 담는다고 하다가 그만 잊어먹고 빠뜨린 대목이라 아쉬움이 크다. 늦었으니 어찌 하리오? 무령왕릉 묘권墓券 제1장 제1쪽은 흔히 무령왕 묘지墓誌 혹은 묘지석墓誌石 혹은 묘지명墓誌銘이라 하거니와, 이에는 무령왕이 언제 몇 살로 죽어 어찌해서 이곳에 묻히게 되었는지 간단한 내력을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는 묘지명이 아니라 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관련 증서, 그러니깐 묘권墓券의 일부로써 서문에 해당하는 대목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의하면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年 62세 되던 해인 계묘년癸卯年 5월 병술丙戌 삭朔 임진壬辰일에 ‘붕崩’ 했다고 한다. 붕이란 붕 떴다는 말이니 죽었다는 말의 높임 혹은 은유다. 한데 이에서 이 글자를 발견한 이들은 백제가.. 2023. 6. 8.
《직설 무령왕릉 추보》(1) 박물관 뜰의 쌀가마니 어제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역임한 미술사학도 강우방 선생이 전화를 주셨다. 내가 무령왕릉 발굴기를 냈다는 소식을 접하시곤 "무령왕릉이라면 나도 증언할 게 있다"면서 얘기를 쏟아냈으니 이야기인즉 이러했다. 강 선생이 무령왕릉 발견소식을 접하기는 그날 석간 신문을 보고서라 했으니 7월 9일이다. 이때 그는 경주인가에서 근무 중이었는데 대전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는 냅다 송산리 고분군으로 달려갔댄다. "내가 도착한 게 오전 8시쯤일 거예요. 한데 현장엔 아무도 없더라고? 이게 어찌된 일인가 했지. 무덤 바닥을 보니 빗자루 자국 비슷한 게 있더라고?" 그래서 다시 냅다 공주박물관으로 갔다고 한다. 한데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고 한다. "박물관에 가서 보니 김영배 관장이랑 수위 달랑 두 명만 .. 2023.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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