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훈 (서울의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학연구실)
북서항로의 개척은 앞에서 말한 것 처럼 영국인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 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앞에서 여러가지 이유를 들었지만 우선 지리적 정보가 너무 없다는것이 가장 문제였는데 이러한 정보의 부족이 바로 치명적 결과와 직결될 가능성이 북극에서는 극히 높았다는 점에서 이 항로의 개척은 시작부터 선박의 난파가 이어졌다.
이런 실패 속에서도 조금씩 조금씩 북서항로-특히 캐나다 북부 해안 지역 일대의 지리적 정보가 추가되었던 것은 소득이라면 소득이라 할 수 있겠다.
1850년대 캐나다 북안 북서항로 지도. 상당히 정밀해 진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존 프랭클린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존 프랭클린
1786년 생. 잉글랜드에서 태어났고, 원래 귀족집안은 아닌 포목상 집안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꽤 장사는 성공적으로 큰 돈을 번 집안이었다고 하지만 당시 왠만한 집은 그랬듯이 무려 12형제중 9번째.
일찍부터 자신의 길을 해군으로 정하고 14세의 나이에 입대하였다고 한다. 해군에서 착실히 경력을 쌓아가다가 저 유명한 넬슨제독 필생의 전투였던 트라팔가 해전에도 참가하였다고 한다. 이때가 1805년. 1815년에는 영국과 신생독립국인 미국간에 벌어졌던 미-영 전쟁에도 참전하여 뉴올리언즈 근처에서 해전을 벌였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나폴레옹 프랑스의 영국 지배의 꿈을 좌절시킨 트라팔가 해전. 프랭클린도 이 해전에 참가했다.
1818년부터 직업군인으로 전쟁에 참전하던 경력을 바꾸어 북극 탐사에 뛰어들었던 모양이다. 1819년부터 22년 사이에 캐나다 북부해안 지역-바로 저 유명한 서북항로의 초입부-을 탐사하였는데 이때 대원 20명 중 9명을 잃었다고 한다. 극한 조건 아래서 벌인 탐사이기는 했겠지만 탐험에서 이렇게 많은 수의 대원을 잃었던 것을 보면 탐험가로서 판단에 문제가 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직업 군인 출신으로 탐험가를 겸하는 경우 생각보다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경우는 꽤 있다. 아문젠과 함꼐 남극점 탐험 경쟁에 뛰어 들어 유명해진 스콧의 경우 직업군인 출신이었다. 스콧이 아문젠에게 왜 패하였는가-. 그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스콧이 오랫동안 군인으로 봉직하면서 길들여진 직업군인의 사고방식이 파탄을 불렀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요는 극한 상황에서의 탐험이란 유연한 사고, 창의적 발상이 생존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군인이라는 직업은 필드웍이 많은 점에서는 탐험가와 비슷하지만 결코 성공적인 탐험에 적합한 직업군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문젠과 최초의 남극점 정복을 다투다 산화한 스콧. 영국해군 장교였다. 여러모로 프랭클린과 닮은 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죽은 대원들은 극한의 조건에서 굶어 죽었다는 것인데 심지어는 식인까지 간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대장으로 프랭클린은 이 점에서 이미 지도력에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었다고 봐도 좋겠다.
1825년에 두번째 캐나다 북쪽 해안 탐험에 들어갔는데 이때는 매우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어 죽는 사람 하나 없이 돌아왔고 서북항로에 대한 새로운 정보도 많이 획득할 수 있었다. 그 공로로 프랭클린은 영국왕실로 부터 작위를 수여 받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1845년. 그가 59세 되던 해.
서북항로 개척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영국왕실의 지원을 받아 두척의 배-. HMS Erebus 와 HMS Terror 를 끌고 무려 134명이나 되는 대원을 이끌고 갈 수 있게 된것이다.
프랭클린이 타고 나갔던 두척의 배 중 하나. HMS Erebus.
1845년 5월 19일.. 마침내 영국을 출범한 프랭클린 원정대는 그린랜드를 지나 서진 또 서진을 계속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린랜드 해안 서쪽에서 포경선에 의해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이 같은 해 7월 26일.
프랭클린이 끌고간 Erebus와 Terror는 여러차례의 대양항해에서 이미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성한 배였다. 1841년. 뉴질랜드에서.
그리고 그 후, 2년간 소식은 완전히 끊겼다.
이 후 아무도 이 배를 다시 본 사람은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소식이 끊겨 걱정이 된 그의 부인이 영국 정부에 수색을 탄원한 것이 1847년.
프랭클린은 134명의 대원과 함께 그야말로 종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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