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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벽에서 튀어나온 신라 불국토의 어벤져스 팔부신중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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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쌓은 경주읍성 구간서 신라 팔부중상 나왔다

송고시간2020-02-21 09:12 

박상현 기자

9세기 중반 석탑 면석 3점, 방어용 구조물에 사용


긴나라(左) 마후라가(右)



건축을 할 적에는 효율성을 추구하기 마련이라, 효율성이란 경제성이다. 돈 많이 안 들이고 하는 방법 중 흔해 빠진 것이 기존 건축부재를 재활용하는 것이다. 이른바 리사이클링 재활용이라, 전통시대 건축에서도 이런 일을 흔해 빠졌으니, 예컨대 경주지역 조선시대 이래 근대기 건축물을 보면 신라시대 석재를 활용한 경우가 그리 많다. 이들 신라시대 석재를 보면 아주 잘 다듬어 놔서 만능 활용이 가능해 기둥 주초나 축대, 혹은 담장을 쌓는데 그대로 재활용이 가능하니 이 얼마나 좋겠는가?


전통시대 건축물은 실은 이런 이유로 상당수가 사라졌다. 


아수라(左) 건달바(右)



고려시대 처음 쌓고 조선시대에 대대적으로 재활용한 건축물로 읍성邑城이 있다. 서울에도 읍성이 있어 이를 한양도성이라 하거니와, 전국 주요 거점에는 거의 예외없이 이런 읍성이 있었으니, 개중에서도 경주 같은 데는 규모가 제법 컸다. 읍성은 대체로 고려 현종시대에 처음 쌓은 일이 많았다. 이때가 아무래도 대 거란 전쟁기라는 시대상황과 밀접할 것이다. 


경주읍성 또한 문헌을 볼 적에 이런 양상을 드러냈다.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 성보城保를 보건대, 경주읍성은 고려 현종顯宗 3년(1012)에 쌓았다 하며 성을 쌓았다 하거니와,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이르기를 고려 우왕禑王 무오戊午년(1378)에 석성石城으로 고쳐 쌓았다 했으므로, 애초에는 토성이었던 듯하다. 그러다가 조선왕조 들어 세종(1418~1450) 연간에 다시 개축한다. 


야차(左) 용(右)



이 경주읍성이 안타까운 점은 도시화 과정에서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성벽은 거의가 다 사라지고 그 편린만 찔끔 남았으니, 그래도 땅 밑에서는 그 기초부는 상당 부분이 남았다는 사실이다. 이 성벽 구간 중에서도 경주시 의뢰로 한국문화재재단이 5구간이라고 명명한 읍성 동문 향일문向日門 주변을 파제꼈다. 하긴 향일이라는 말 자체가 해를 바라본다는 뜻이니, 해가 뜨는 곳이 동쪽 아니겠는가?


암튼 이 일대를 파제꼈더니, 성벽 기저부는 그대로 남았고, 덧붙여 치성雉城 흔적도 찾아냈다. 요새야 치성이라 쓰지만, 옛날 문헌을 보면 그냥 雉(치)라고 하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치란 무엇인가? 뱀 몸뚱아리처럼 죽죽 뻗어가던 성벽 몸체가 각중에 개구리 집어 삼킨 뱀 배때지처럼 밖으로 툭 튀어나온 옹이가 있는데, 이를 일러 치라 한다. 




공중에서 내려다 보면 방형 아니면 둥근 반달 형태인데, 기능은 뭐냐? 뭐겠는가? 감시 초소지. 그런 편편한 곳에다가 망루 같은 걸 세우면 이를 흔히 영어로는 watch tower라고 하는 데서 그 기능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한데 이번에 발굴한 경주읍성 치성을 보니 공중에서 내려다 보면 직사각형 형태라, 그 테두리를 두른 바닥돌에서 느닷없이 9세기 무렵 제작품으로 생각되는 통일신라시대 말기 석탑 부재가 기어나왔다. 이것이 석탑 부재인 줄 어찌 아는가? 뭐 설명해야 알겠는가? 척 보면 알지? 오빠 믿지? 이걸로 충분하다. 


이 석탑 부재는 모두 3장이 발견됐는데 편편넙적하게 아주 잘 다듬은 돌이라, 모서리 바닥석으로 쓰기엔 안성맞춤이다. 이 부재는 통일신라 석탑에서는 비교적 흔하게 보는 팔부중상八部衆像, 혹은 팔부신중八部神衆이라 일컫는 불법을 수호하는 어벤져스 여덞마리를 두 마리씩 새겨 놓은 3점으로 드러났다. 


팔부신중 판때기 출현 장소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 호위병들인 팔부신중이란 천天·가루라迦樓羅·용龍·야차夜叉·건달바乾闥婆·아수라阿修羅·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摩喉羅伽를 말하거니와, 이번에 확인한 것은 긴나라·마후라가 것, 아수라·건달바를 표현한 것, 그리고 야차와 용이 등장하는 부분이다. 나머지는 천과 가루라가 세트임이 확실한데, 이건 어디다 구워먹었는지 아직은 찾을 길이 없다. 


이런 팔부신중 조각은 석탑에서 보면 몸체를 받침하는 시설인 기단 네 벽면을 장식하곤 하거니와, 그것도 대체로 방향성이 있어 긴나라·마후라가는 북쪽, 아수라·건달바는 남쪽, 야차와 용은 동쪽 부분 석탑 기단 면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천과 가루라를 새겼을 미씽 돌판은 석탑 서쪽에다가 장착했을 것이다. 




이들 판대기 돌을 재어 보니 너비 75㎝, 두께 약 20㎝라, 한데 길이는 북쪽 면석 148㎝, 남쪽 면석 184㎝, 동쪽 면석 166㎝로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 탑에서 나온 것이 아니란 말인가? 


이런 의문에 조사단은 "세 면석이 동일한 석탑에서 나온 것은 맞다"고 자신있게 주장했다는데, 글쎄.....맞을랑가 모르겠다. 


암튼 신라시대 석탑을 뽀개서, 아니면 이미 뽀사진 채 나뒹구는 걸, 에랏 돌 새로 다듬기는 싫고 한데 잘 만났다 해서 석성을 쌓던 사람들이 가져다가 썼음에 틀림없다. 그렇게 신라시대 유산은 장렬히 조선시대를 위해 산화해간 것이다. 


한때는 불국토를 수호했을 팔부신중은 그렇게 조선시대 왜적을 방비하는 어벤져스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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