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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누가 반역자인가? 학력 차별이 계엄이요 반란이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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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그에 따른 남북 분단 직후 이 땅에 남은 이른바 정통 고고학도는 김정학 오직 한 명뿐이 있을 뿐이었다.

훗날 한국고고학을 적어도 학계 혹은 강단에서 양분하게 되는 손보기와 김원룡은 고고학과는 영판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해방 이전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과정인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손보기는 일본으로 유학갔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한 다음 서울대 문리과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들어가 1949년 서울대에서 '신라시대 화랑 연구'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서울대 사범대 역사교육과 강사를 거쳐 교수로 재직하다가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라 1963년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대학원에 Social history of the early Yi Dynasty 1392-1592 : with emphasis on the functional aspects of governmental structure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선 귀국해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취임해 이듬해 역사적인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한다. 

그가 이전에 고고학에 어떤 열정을 지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저 이력 어디에서도 고고학과 직접 관련한 그 어떤 흔적도, 족적도 없다. 

주민등록상으로는 손보기와 같은 1922년 생인 김원룡은 해방 이전에는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는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가 동 대학 예과를 수료하고는 법문학부로 진학해 동양사를 전공했으며 해방 직전인 1945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동양사학전공)를 졸업하며 문학사를 취득했다.

해방 후 국립박물관에 들어가 일하면서 재직 중 미국 뉴욕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중 미술사 전공에 들어가 '신라토기의 연구'로 1960년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1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가 창설되면서 그 교수로 취임해 고고학과 미술사를 오가며 강의했다. 

손보기에 견주어서는 그나마 고고학 세례를 일찍 받은 흔적을 보이지만 그는 누가 봐도 고고학 전업이 아니었으며 미술사학도였다.

그의 이력에서 특히 초기 박물관 근무시절 고고학 발굴현장에 가끔 이름을 올리기는 했지만, 그 자신은 실상 발굴 경험이 전무했다. 

이런 그가 실상 처음으로 발굴책임자가 되어 발굴조사를 벌인 곳이 1964년 풍납토성 시굴조사였다.

손보기가 석장리 유적을 발굴하며 한반도에서 구석기 문화가 존재했음을 알린 그 해에 그는 학부생들을 데리고 며칠 풍납토성 가서 시굴 트렌치 몇 개 박아 실습 발굴을 했으니 이것이 실상 그의 고고학 발굴 시작이었다. 

결국 한국 자생 고고학 태두로 일컫는 손보기 김원룡 두 사람 모두 고고학과는 전연 무관한 젊은 시절을 보냈고, 고고학은 그네들이 대학에서 교수로 교편을 잡으면서 비로소 본격 발을 들여놨다. 

요새 엄격한 조사원 자격기준을 갖다 들이대면 두 사람 모두 준조사원 자격도 되지 못한 상태서 발굴에 뛰어든 것이다. 

저들들이 저때 배출한 초창기 후학들이 비로소 고고학 전업이라 할 만하니, 이들이 한국고고학 2세대 중 한 축을 형성한다. 

손보기 김원룡 1세대와 그들이 길러낸 초창기 2세대 사이에 한국고고학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김정기다.

한데 1.5세대라 일컬어야 할 이 김정기 역시 1세대랑 마찬가지로 고고학도가 아니었다.

일본에서 고건축을 공부하다 끌려와서 강제로 국립박물관에 근무하면서 고고학에 본격 발을 디딘다.

그 디딘 시기는 1.5세대임에도 외려 1세대인 손보기 김원룡보다는 빠르다.

1958년인가부터 아마 본격적인 발굴을 했을 것이다. 

저 2세대 한국고고학은 그 학맥으로 보면 1세대가 직접 길러낸 부류가 있는가 하면, 김원룡 손보기가 그랬던 것처럼 애초에는 고고학과는 전연, 혹은 거의 무관한 궤적을 그리다가 느닷없이 고고학으로 뛰어든 부류가 있다. 

영남 쪽 심봉근과 정징원이 대표적이다.

훗날 동아대 총장을 역임하는 1943년 생 심봉근은 석사까지 고고학과는 담을 쌓은 삶을 살았다.

1969년 동아대 대학원에서 제출한 석사학위 논문이 '동학사상 소고'였다.

요컨대 그는 이때까지는 동학 전공자였다.

그러다가 1979년 '일본 야요이문화 형성과정 연구'라는 박사학위를 동 대학원에서 취득함으로써 글쎄 표현이 좀 그렇다만 고고학도로 세탁한다. 

부산대 출신인 정징원은 1968년 경남지방 도자기 연구 :도요지陶窯址 및 그 출토품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언뜻 보면 고고학연한 냄새가 나지만 천만에. 그는 미술사학도였다.

이런 그가 훗날 고고학 전업을 선언하고선 부산대에서 후학들을 길러내게 된다. 

내가 이런 이력들을 왜 이야기하는가?

그 분야 전문가 혹은 그 분야 자격증을 만드는 것은 학력이나 학위논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내가 어떤 공부를 했건말건, 내가 좋아서 미친 듯이 달라드는 분야가 곧 내 전공이요, 그들이 곧 전문가임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것은 학력으로 규정할 수 없다. 학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첫째 열정이며 둘째 경험이다. 

그런 점에서 애초 고고학 무자격자였던 저들이 외려 더 위대하게 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한데 요새 돌아가는 꼴을 보면 곳곳에다 학력으로 제한하고 학위로 차별한다.

대학 안 나오고 관련 학과 관련 학위가 없으면 아예 그 직업 진출도 못하게 막아놨다.

왜 기회까지 박탈한단 말인가?

학력으로 차별하고 전공으로 차별하는 이런 짓거리야말로 백주대낮의 계엄령이고 백주대낮의 내란이다.

계엄? 내란?

저런 차별을 만든 너희가 바로 반역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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