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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2560

반달모양돌칼, 암흑으로 돌아가야 할 때 이제 우리 칼끝은 저 그림을 누가 그리기 시작했느냐로 향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 그림이 완성 혹은 제기되기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왜?우리는 왜 거기로 돌아가야 하는가?일단 저리 그리기 시작한 그림, 그렇게 완성된 그림은 그 이후 전개하는 모든 관련하는 논의를 거기로 구속 제한하는 까닭이다. 일단 저리 완성한 그림은 모든 논의를 저에 끼워맞추어 쳇바퀴를 돌리게 된다. 블랙홀이다. 그런 쳇바퀴는 마침내 저 방식을 증명하는 모든 노력으로 귀결하게 되거니와 나락 몇 포기 짤라보고선 그래 맞네?하는 안도 혹은 확인을 초래했으니 이 모든 논의를 우리는 암흑으로 돌려야 한다. 그리하여 저들이 출현했을 당시,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일꼬? 를 고민하는 바로 그 지점으로 우리는 다시 가야 한다. 거기서 우리는 .. 2025. 3. 5.
종국으로 치닫는 반달모양돌칼 반달모양돌칼은 종착점 도달 직전이다.그 전에 우리는 잠시 중국으로 외도했다가 외치 집에도 잠시 들를 것이다.아..신라도 갈 것이다.다시 말하지만 고고학도 백 놈이 다 그리 말한다 해도 내가 납득하지 못하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내가 미쳤다고 남들 따라지를 한단 말인가?세상 모든 혁명은 엉뚱에서 비롯한다.엉뚱 발랄해야 한다.나는 그 엉뚱 발랄을 가고자 한다. 이 여행이 끝나는 지점엔 모든 의문이 봄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2025. 3. 5.
구멍 하나를 뚫은 중국 신석기 돌칼 우리는 반달모양돌칼이라 하지만, 근간에서 같다 할 수밖에 없는 같은 신석기시대 돌칼이 중국에서도 보인다. 왼쪽은 우리처럼 구멍을 두 개 뿅 뚫었으나 오른 편처럼 구멍 하나를 뿅 뚫은 것도 있다. 모양도 약간은 달라서 우리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것과는 달리 이쪽은 역시 중국 식칼 같다. 역시 날은 요즘 낫처럼 한 쪽 면만 비스듬히 깎았다. 근간이 무엇을 베기 위한 것이라는 데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물론 곡물을 벨 수도 있다. 칼이란 무엇을 자르기 위한 용도이니 필요에 따라 이것저것 다 쓴다. 아무리 돌이라 해도 손바닥으로 문지르는 쪽은 맨질맨질해야 한다. 저 중국 칼도 물론 사진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안 보인다. 문제는 그 사용 방법. 저기에 끈을 찡가서 그걸 엄지손가락에 찡가서 썼다 한.. 2025. 3. 5.
나무 손잡이 찡가서 쓴 유럽 신석기 돌칼 A well-preserved Neolithic knife, the blade was made of flint and fastened with birch tar in a handle made of wood. From the pile dwelling settlement at Wangen-Hinterhorn, Lake Constance, dating 3800-3500 BC.  잘 보존된 신석기 시대 돌칼이다. 돌은 플린트flint이며 나무 손잡이를 찡갔다.지 찡감을 공고히 하고자 자작나무 타르로 본드칠을 했다.기원전 3800-3500년 무렵 콘스탄스 호수 왕엔-힌터혼 기둥박은 집터에서 출토됐다. 한데 저 나무 찡굼 손잡이 한 쪽 끝에 구멍이 뚫려있다.저 구멍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용도인가? 대체 뭔가?저 의.. 2025. 3. 5.
자작나무 타르로 손잡이 본드칠한 신석기 돌칼 기원전 2900년 내지 2800년 전, 그러니깐 지금으로부터 대략 5천년 전 후기 신석시시대 돌칼인데 나무 자루가 달렸다. 양쪽 면을 합성한 것이다. 독일 남서부 콘스탄츠 호수 Lake Constance 근처 알렌스바흐Allensbach에서 발견되었다.분석 결과 돌은 이탈리아 북부 몬테 발도Monte Baldo에서 채취했다.엘더우드elderwood라는 딱총나무 속으로 만든 손잡이에는 자작나무 타르birch tar로 돌날을 본드처럼 붙였다. 유럽 쪽 석기를 보면 저처럼 자작나무 타르를 붙인 유물이 더러 보인다. 저 유물이 현재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 2025. 3. 5.
[무령왕릉] 냉침대를 좋아한 왕과 왕비 어제 새삼 김규동 관장한테 전화로 물어봤다."그렇담 말이오 익산 쌍릉에서도 웬간한 모습으로 관짝이 나왔는데 거긴 바닥 있습디까?내 기억이 확실치 않습니다.""있다마다요. 무령왕릉은 왕도 그렇고 왕비도 모조리 바닥이 없어요."더는 물을 필요도 없다.금송으로 만든 관짝 남은 양태 보면 아주이주 잘 남아서 바닥만 쏙 다 썩어 문드러졌을 가능성 제로다. 그 남은 관짝 상태가 얼마나 좋은가 하면 조유전 선생 증언이 유감없이 증명한다."처음 문을 열고 들어가서 관재를 밟았더니 끄떡 없었다."그랬다.무령왕과 그 왕비는 관짝에 바닥이 없었다.맨땅에 두 분 다 등때기를 대셨다.두 분이 냉침대를 좋아하셨나 보다. *** previous article ***  무령왕릉 발견 50주년의 폭탄 선언 "관짝에 바닥이 없다!"ht.. 2025.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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