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앞서 무덤에 봉분이 등장함으로써 조상 추숭 의례는 종래 그 혼령인 신주를 모신 종묘(집안으로 좁히면 가묘家廟) 말고도, 그 후손이 무덤에 직접 가서 제사를 올리는 능행陵行도 생기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따라서 봉분의 출현은 廟에서 墓로 조상 추숭 의식이 이동(혹은 병행)했음을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는 말도 덧붙였다.
![](https://blog.kakaocdn.net/dn/boi8bF/btqNRH6cBDd/r4NckPM72IhNvwjGykXuTk/img.jpg)
자, 이런 내 말을 단칼에 증명하는 대목이 있다. 《고려사절요》 권제3권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갑인 5년(1014) 여름 4월 조 대목이다.
“왕이 친히 재방齋坊에 체제禘祭하고 (선대왕과 그 부인들에게) 존시尊諡를 더 올렸다. 당시에 대묘大廟가 완성되지 못하여 매양 시제時祭가 되면 각기 해당 능陵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가 이제 재방을 수리하여 임시로 신주를 모시고 비로소 (바로 앞선 왕인) 목종을 부묘하고, 유배 죄 이하에 해당하는 죄수들을 사면했다.”
親禘于齋坊,加上尊諡,時大廟未成,每値時祭,各於本陵,遣官行事,令修齋坊,權安神主,始以穆宗祔,赦流罪以下。
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조금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이 일이 있기 직전, 고려는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당하고, 왕 자신은 호남으로 피신까지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궁궐이 불타고 태묘(종묘)도 소각됐다.
![](https://blog.kakaocdn.net/dn/QETC6/btqNMMVqLsh/sUyahVL6n5zAc44bxHXltK/img.jpg)
환궁한 현종은 당연히 궁실 재건에 나섰다. 궁궐을 다시 짓고 그 일종인 태묘도 재건에 나섰다.
하지만 이 공사는 시일이 걸리므로, 그때까지 임시로 큰 행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태묘가 완성되기까지 그것을 대신할 공간이 있어야 하므로, 그 임시 공간을 제방齋坊이라 했다.
하지만 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 임시 건물에서 사시사철 제사를 드리는다는 것이 영 가오가 상하는 일이었다.
이에 그에 대한 대응으로써, 제사를 받을 선대왕과 그 정비들은 관원을 대신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관원이 대신갔다 하지만, 이는 엄연히 왕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이었다.
왕이 직접 가지 못한 이유는 빤하다. 정국이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 많은 무덤을 어찌 왕이 일일이 돌아본단 말인가?
![](https://blog.kakaocdn.net/dn/dgFOXG/btqNQ23QbaA/45VpBKbvtYIn7cxS3vSeEK/img.jpg)
墓, 혹은 그 일종인 陵이 廟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이처럼 명확히 보여주는 대목은 드물다. 《절요》를 읽다가 한 줄 긁적거려둔다.
***
한 줄 한 줄 허심하게 넘길 대목이 없다. 내가 기록을 볼 때 언제나 명심하려 하는 점은 이것이 무슨 뜻이냐가 아니다. 왜 기록자는 이 기록을 남겨야 했는가다.
왜 이 친구는 허구 많은 사건 중에서 유독 이 기록을 선택해서 남겼을까?
why가 중요하지 그 외는 우수마발이다.
(2017.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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