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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거란의 치맛바람] (7) 궁중 가수와 바람피다 죽임 당한 절세 미색 황후 소관음蕭觀音

by taeshik.kim 202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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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道宗은 거란 제8대 황제요 흥종興宗의 장남으로 일찍이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중희重熙 24년, 1055년 8월에 아버지가 붕어하자 제위를 이었다. 재위 기간은 수창壽昌 7년(1101)까지 근 반세기에 달한다.

그의 재위 기간 쓴 연호가 하나가 아니다. 청녕淸寧(1055~1064)을 필두로 함옹咸雍(1065~1074)과 태강太康(1075~ 1084), 태안太安(1085~1094)을 거쳐 수창壽昌(1095~1101)에 이르기까지 5개나 썼다.


비파 타는 절세가인



꼭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한 황제는 하나의 연호를 쓴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또 연호는 보통 국가의 대사大事에 즈음해 그것을 기념해 바꾸니, 이는 거꾸로 보면 그만큼 저 긴 치세 동안 적지 않은 정치 곡절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긴 극성을 구가한 거란도 도종 시대를 지나 그 아들 세대에 이르러 망했으니 말이다.

도종은 긴 치세 만큼 여자 관계가 좀 복잡하다. 

요사遼史 권63 열전 제1 후비后妃 전에서는 먼저 그의 황후로 선의황후宣懿皇后 소씨蕭氏를 들었으니, 어릴 적 이름이 관음觀音인 이 여인은 아버지가 흠애황후欽哀皇后 동생인 추밀사樞密使 소혜蕭惠의 딸이다. 



이 분 남성? 여성?



흠애황후가 누구인가? 앞에서 여러 번 소개했듯이 애초에는 성종聖宗의 후궁이었다가 아들 흥종興宗을 낳아 훗날 성종이 죽자 모후로서 권력을 농단한 소누근蕭耨斤이다. 

거란이 엄격한 족외혼을 규정했지만 실상 따져 보면 근친혼으로 얼키설키했다는 말을 했거니와, 이 경우도 마찬가지라, 현재 황실의 태후나 황후를 중심으로 그 조카딸(혹은 그 비슷한 여인)을 며느리로 맞아들이는 전통이 유감없이 확인된다. 

그의 어릴 적 이름 관음은 말할 것도 없이 불교가 당시 국교이다시피 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기는 하지만, 관음보살은 말할 것도 없이 성별로는 남성인데, 이 이름을 따다가 여자 이름을 지었으니 이채롭기는 하다.

다만 이 관음보살은 불보살 중에서는 무척이나 여성적인 면모가 강한데, 현현할 때는 30대 중년 여인으로 등장하기도 하니, 그런 점이 반영된 명명이 아닌가 싶어 적기해 둔다. 

소관음을 일러 요사 열전은 자태가 빼어나고 시를 잘 지었으며 담론을 잘하고 악기에서 일가가 있어 특히 비파를 잘 탔다 한다. 만능 엔테테이너 걸그룹 리드 보컬이었다.

중희重熙 연간에 도종이 연조왕燕趙으로 있을 적에 그 비가 되었다가 청녕清寧 초기에 도종이 황제가 되면서 당연히 황후로 책봉되니, 이때 받은 존호가 의덕황후懿德皇后였다. 선의황후宣懿皇后는 훗날 죽은 뒤에나 얻은 이름이다. 


비파



당대 황실을 필두로 지배권력층 여성으로 미모라면 황태숙皇太叔, 곧 황제의 숙부인 야율중원重元의 마누라를 첫손에 꼽았지만, 이런 그조차도 의덕황후를 친견하고 나서는 다시는 미모를 말하지 않았다 하니 그 시대 절세가인이었다. 

소관음은 훗날 태자 야율준耶律浚을 낳고서 기세는 더욱 등등해져 황제의 밤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그의 영광은 요란스럽게 끝났다.

태강太康 초기, 궁에서 일하는 여자 노비 선등單登과 교방教坊에서 일하는 주정학朱頂鶴이 황후를 고발했는데, 그 내용인즉슨 황후가 궁중 악단원인 영관伶官인 조유일趙惟一과 사통한다는 것이었으니, 이를 당시 추밀사樞密使 아율을행耶律乙辛이 황제한테 보고했다.

그러자 황제는 야율을행과 장효걸張孝傑한테서 진상을 조사케 하니 밀고 내용이 사실로 드러났다.

이에 조유일은 일족과 더불어 죽임을 당하고 황후는 자진케 하고는 그 시체를 본집에 보내버렸다.


얼굴이 왜 이래?



황후로 예우를 못해주겠다는 의미였다. 

말로가 비극이었지만, 참말로 멋진 인생 살다갔다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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