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꿈을 이루려는 사람이 취하는 방향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것을 '주체의 전면 자발성'이라는 측면에서는
1. 자신이 직접 나아가는 방법
2. 대타를 내세우는 방법
이 두 가지 정도가 있지 않을까 한다.
대통령 되겠다고 설레발치는 사람들이 전자의 부류라면 이른바 이들의 참모 중 일부는 후자에 해당한다.
역사를 보건대 먼저 중국사에서는
후자의 대표주자로 진시황 아비를 황제로 만든 여불위가 있고
한국사에서는 이성계를 앞세운 정도전이 있다.
대타를 내세워 자기 꿈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은 대체로 종말이 좋지 못하다.
이들은 결국 막판에 선택의 기로에 몰리게 되니, 바로 전자를 향해 깃발을 들것인가 아니면 전자가 내리는 죽음을 택할 것인가 이 선택이 있을 뿐이다.
김유신을 본 적 있는가?
생평 전장과 중앙정치권을 오가며 신하로서는 끝갈 데 없이 간 김유신을 생각한 적이 있는가?
79세를 장수하며 영웅적 삶을 자연의 죽음으로 마감한 그가 죽기 전에 문병을 온 문무왕 김법민에게 남긴 말....
"신을 의심하시지 않으시고 믿어주셨으니..."
이 말 참말로 무서운 말이다.
나는 이 시대 신라사를 보면 왜 김춘추와 김법민이 김유신을 어떤 이유를 달아 처단하지 않았는지가 몹시도 궁금했다. (2011. 11. 8)
****
저 물음에 스스로 답할 때다.
나는 김춘추와 김법민이 다르다고 본다.
첫째 김춘추..김춘추는 김유신 등에 업혀 왕이 된 사람이다. 그는 김유신을 처단할 힘이 없었다.
김유신은 두 번이나 왕을 갈아치웠다. 앞서 진덕을 세워 국정을 농단했고 진덕이 죽자 원로회의를 빌려 처남을 앉혔다.
대들지 않는 춘추를 다시 바꿀 이유는 없었다.
김법민..그가 합법으로 즉위할 때 이미 외삼촌 김유신은 67살이었고 갖은 위광은 다 가졌다. 이젠 삼촌이 있어야 했다. 걸핏하면 자신을 왕좌에서 끌어내려려 하는 당, 그리고 부화뇌동하는 반신이 드글드글하는 신라조정에서 그의 절대 지지기반인 김유신은 그 존재만으로 김법민은 고맙기 짝이 없었다.
영화 황산벌 투인가를 보면 문무왕 김법민이가 허리 꾸부정한 삼촌을 보면서 하는 말.."삼촌은 일찍 죽지 마소" 핵심을 찔렀다.
하지만 권좌는 영원하지 않았다. 그가 죽자 신문왕 김정명이 마침내 김유신을 향해 칼을 빼들었다.
***
김유신은 진평왕 시절 금수저로 태어나 진평왕 시대에 출사해서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으니, 국선이 된 15살 이래 고공행진을 거듭하며 단 한 번도 권좌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60년 권좌를 자랑한 그는 왕으로는 진평 선덕 진덕 무열을 거쳐 문무왕 시대를 살았으니 이 기간 왕은 두 명이나 자기 손으로 만들어 앉혔다.
선덕 진덕시대, 혁혁한 군사업적으로 세상을 농락한 그는 신라군 총사령관으로 백제를 멸했으며, 노령으로 건강이 악화한 고구려 정벌 때는 친정한 왕을 대신해 수도 계림을 진수한 총사령관이었다.
그의 존재 하나로 계림에서는 그 어떤 누구도 반란을 획책할 수 없었다.
이런 그를 왜 왕들은 눈뜨고 보고만 있었을까? 그를 향한 신라 왕들의 칼날이 그가 죽자 비로소 가능했다는 점은 김유신의 위상을 단적으로 가늠케 한다.
단군조선 이래 이런 권신權臣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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