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찮게 벌어지는 궁능 멧돼지 출몰…2000년 이후 53차례"
송고시간 2022-10-23 07:05 고동욱 기자
임오경 "문화재청, 경계시설 설치 등 예방책 마련해야"
우생순 신화 주인공이 어찌하여 저 진흙탕 정치판에 뛰어들었는지 그 속내야 복잡하겠지만, 암튼 저 임씨가 국회의원 되시고서는 약간 뻘짓이라 할 만한 일도 하지 아니하는 것은 아닌데, 이른바 청와대 한복 촬영 논란에서 보인 행적은 그를 조금은 아는 나로서는 기이하기 짝이 없었으니, 그런 그가 이제 저 멧돼지 문제를 들고 나오셨다 이거다.
그래 저거야 관람객 안전과 연동하는 중요한 문제이니, 지적할 만도 한 사안이라 보고서는 저 멧돼지를 야생에서 마주치는 일이 왕왕 있는데 실은 공포감을 주는 일이 많다. 저 놈들이 보통은 가족 단위로 움직이거니와, 한 마리 단독으로 움직이는 일은 거의 없어 쪽수 믿고 까부는 일이 많다.
멧돼지 숫놈 암놈 다 그런지 모르겠지만, 저놈 성체 어금니는 공격성 그 주된 무기라, 그기에 바치면 뼈도 못 추린다. 연전 북한산 형제봉 올랐다가 하산하는 길에 7마리 정도로 떼로 움직이는 멧돼지 일가족을 마주한 일이 있는데 그네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진짜로 땅이 진동했다.
그렇다고 생판 촌놈인 내가 그에서 두려움을 느낀 건 아니었으니, 암튼 그네 일가족이 후다닥 지축을 울리며 지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서는 아이고! 조금만 천천히 움직였으면 내가 카메라로 포착이나 하지 하도 재빨리 이동하는 바람에 그 생생한 이동장면을 놓친 대목이 몹시도 아깝기 짝이 없었다.
각설하고 심심해서 조선왕조실록에다가 멧돼지라는 검색어를 넣고는 조선시대에 실록에 자최를 남긴 멧돼지 형적을 추적하니, 이런저런 그와 연동하는 증언이 없지는 아니해서 멧돼지 사냥과 그 고기 공진貢進, 멧돼지 출몰에 따른 농작물과 인명 피해, 그리고 멧돼지에 비유하는 각종 언설이 보이거니와
먼저 멧돼지를 비유하는 사례를 보면, 탐욕과 그 앞뒤 안 가리는 저돌성을 착목한 대목이 압도적이거니와, 하긴 뭐 저돌猪突이라는 말부터가 멧돼지를 착목한 표현이지 않겠는가? 이 경우 猪는 흔히 집돼지라 하지만 저돌이라 할 적에 그 저는 볼짝없이 멧돼지를 말함이다.
이 멧돼지에 따른 농작물 피해는 이미 조선전기부터 줄기차게 보고되거니와
세종실록 53권, 세종 13년(1431) 8월 10일 임인 5번째 기사에 이르기를
병조에서 강원도 감사의 첩정牒呈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회양부淮陽府의 남곡嵐谷 등지는 강무장講武場과 가까우므로 사냥을 금했기 때문에, 멧돼지가 번식하여 곡식을 해침이 더욱 심하오니 금했던 사냥을 풀어 주소서."
하니, 지금부터 멧돼지 잡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라 했으니, 결국 멧돼지 그 피해를 줄이는 방법은 인위에 기반하는 사냥밖에 없음을 알겠다. 하지만 멧돼지 사냥이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아니해서 요즘도 그 멧돼지 사냥이 간난함을 전하는 각종 방송 프로그램이 빈발하거니와, 총이 없이 화살과 칼 혹은 그물로만 때려잡던 그 시절 그 혼란은 오죽했겠는가?
같은 세종실록 50권, 세종 12년(1430) 11월 12일 기유 3번째 기사에 이르기를
궁중에서 사용하는 법주法酒에 노루 뼈를 넣는데, 상호군 김척金陟과 대호군 마변자馬邊者가 그 때문에 풍양豐壤에서 사냥을 하는데 사복시의 제원諸員인 엄용嚴龍이 멧돼지에게 살해되었다. 명령을 내리어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곧 석방하고,
"지금부터는 노루 뼈를 넣어서 담는 술은 만들지 말라."
하고, 엄용에게는 쌀과 콩 아울러 5석, 종이 50권을 내렸다.
이를 보면 멧돼지에 걸려들어 그것을 사냥하던 사람이 죽임을 당하기에 이른 일을 본다.
같은 세종실록 55권, 세종 14년(1432) 2월 25일 갑인 1번째 기사를 보면 또 다른 인명피해가 보고됐으니
구목驅牧이 산을 감시하는데 한 마리 큰 멧돼지가 화살에 맞고도 포위망을 뚫고 나와 내구마를 들이받아 죽게 하였다. 사복 제조 최윤덕·정연 등이 아뢰기를,
"여러 관원이 조심하여 간수하지 않아서 〈내구마를〉 받히어 죽게 만들었으니, 청컨대, 그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뜻밖에 생긴 일이니 어찌 큰 멧돼지가 꼭 이 말에게 달려와서 부딪힐 줄을 알았겠느냐. 그 일은 거론(擧論)하지 말라."
하였다.
라 한 대목이 그 증거다. 시간을 좀 지나 성종실록 109권, 성종 10년(1479) 10월 12일 갑오 2번째 기사를 보면
멧돼지가 사람을 다치게 하였는데, 내의內醫에게 명하여 가서 구료救療해 주도록 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멧돼지 사냥하다 그에 받쳐 심대한 부상이 있었나 보다.
멧돼지가 초래하는 피해 중에 뭐니뭐니 해도 농작물 갉아먹기라
성종실록 283권, 성종 24년 10월 8일 기사 4번째 기사를 보면 이렇다.
병조판서兵曹判書 한치형韓致亨 등이 와서 아뢰기를,
"평안도 강변 여러 고을에 새앙쥐[鼷鼠]와 곰·멧돼지가 곡식을 거의 다 먹어버려 이로 인해 농사를 실패하여, 초가을에 면포綿布 한 필이 쌀 6, 7말[斗]의 값이 되었는데 지금은 쌀 두 말 값이라고 합니다. 합방合防 군사가 비록 면포를 가지고 가더라도 백성이 가진 곡식이 없으니, 무엇으로 양식을 준비하겠습니까? 우후虞候는 병사兵使의 다음인데, 유호兪顥는 이미 나치해 왔고, 조극치曺克治는 바야흐로 논박論駁을 당하였으니, 방어防禦하는 모든 일이 혹시 허술해질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대신을 보내어 방어하는 형세를 살피게 해야 할 것인데, 만약 대신의 행차가 폐단이 있다고 한다면, 집의執義 민효증閔孝曾이 여러 해 서쪽 변경을 출입하여 변경 일을 갖추어 아니, 민효증으로 하여금 단기單騎로 가서 살피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멧돼지는 저돌성이 무기인 만큼 그를 상대로 하는 희롱도 있었으니, 각종 기행을 남긴 연산군 때 일이다.
연산군일기 61권, 연산 12년(1506) 2월 13일 계해 4번째 기사를 보건대
우리[檻]에 큰 호랑이와 큰 멧돼지를 실어 후원에 들여오기도 하고 혹 호랑이를 대성전大成殿 안에 가둬놓고 벽에 구멍을 뚫어 활을 쏘기도 하였다.
이걸 보면 멧돼지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아다가 사냥놀이를 했음을 본다.
멧돼지 피해 중에 산소 파헤치기는 요즘도 늘 당하는 일이라, 저때도 있었나 보다.
중종실록 31권, 중종 13년(1518) 1월 27일 정묘 1번째 기사를 보건대
조강에 나아갔다. 지평 조한필曹漢弼과 헌납 김인손金麟孫이, 하종해河宗海 등 네 사람과 홍혼洪混·정한원鄭漢元 등의 일을 아뢰었다. 영사領事 정광필鄭光弼이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공릉恭陵 위를 멧돼지가 파헤쳤다 하오니, 매우 놀랍습니다. 먼저 사유를 고하는 제사를 지내는 일은 으레 행해야 하는 것이므로 지금 관원을 보내어 별도로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수축修築한다 하더라도 만일 또다시 그렇게 되면 역시 소용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그 짐승을 몰아낸 뒤에 함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가서 살펴본 뒤에 처리해야 한다. 비록 멧돼지의 소행이라 하더라도 실은 재이災異이다. 사직제社稷祭 날이 임박하여 친제親祭하기가 어려울 듯하니, 관원을 보내 제사지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정조실록 37권, 정조 17년 1월 12일 병오 3번째 기사를 보면 장용청 설치 연혁을 논하는 중에
산간 백성들이 처음에는 꿩 사냥에 시달렸다 다시 섣달 멧돼지 사냥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먼저 꿩 사냥을 중지시키고 다음으로 섣달 멧돼지 사냥을 중지시켰다.
라는 대목을 접하거니와, 이걸 보면 조선후기에는 섣달에 주로 멧돼지 사냥을 했음을 본다.
그렇다면 멧돼지 사냥은 왜 했을까? 단백질 공급원 확보도 있겠지만, 어차피 그렇게 잡은 고기는 대체로 조정 상납용이었으니, 주로 종묘에다가 친신하는데 썼다.
성종실록 245권, 성종 21년(1490) 윤9월 19일 무술 1번째 기사를 보면
(임금이) 청계산淸溪山에 거둥하여, 사냥하여 노루·사슴·멧돼지·토끼등 모두 25마리를 잡았는데, 주서注書 최세걸崔世傑을 보내어 잡은 짐승을 종묘宗廟에 바쳤다.
고 했으니, 물론 이 경우는 임금이 직접 잡은 것이라 해서 이리한 것이로대, 멧돼지 고기가 이리 사용됐음을 주목해도 좋다. 이건 역사를 통털어 동아시아에서는 그랬다.
이 멧돼지가 요새는 아프리카돼지열병이니 하는 동물전염성을 옮긴다 해서 질타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임오경이 느닷없이 멧돼지 문제를 들고 나와 그에 격발해 두서없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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