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조선후기 재지 사대부들은
국가에서 녹을 먹지 않고도 충분히 대대로 먹고 살 수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그 경제적 기반은 결국 향촌사회의 지주라는 신분에서 나오는 것인데
문제는 이러한 대대로 먹고 살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그 어떤 의무 없이도 주어지고 있었다는 점이 문제겠다.
예를 들어 일본의 경우 에도시대
막부이건 번이건 간에 이에 소속된 사무라이들은
대대로 녹을 받아 먹는 대신에
유사시 소정의 군사력을 제공하도록 정의되어 있었다.
유사시 내놔야 하는 군사력의 반대급부로
석고제 하의 녹이 주어지는 것이다.
반면에 한국, 조선후기 사대부들은
이와 비슷한 토지를 소유하고 이로부터 나오는 재부로 대대로 먹고 살지만
그 반대급부로 내놔야 할 부분이 정의된 바 전혀 없었다.
조정에 출사하여 관직에 봉사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군역을 져야 했던 것도 아니고
조선후기의 사대부들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힘의 공백지 안에서
향촌의 주인공으로 대대로 먹고 살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외부로부터 침략이 있을 때
일본이라면 석고제에 따라 당연히 병력을 이끌고 나서야 할 의무가 있었던 사무라이들에 반해
조선의 사대부들은 조정에 출사하지 않으면
누란의 위기에 처해도 병력이나 재부를 내놔야 할 어떤 의무도 없었고,
만약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력이나 재부를 내놓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것은 의무가 아니라 "의병"으로 칭송받는 상황이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얼핏 듣기에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고 하는 집안이 있다면
참으로 욕심이 없고 청렴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사실은 뒤집어 보면 벼슬 안해도 먹고 살 수 있고
오히려 벼슬을 하면 군신관계에 입각
위기의 상황에서 뭔가 내놔야 하는 상황이 되니
차라리 그런 것은 하지말라는 권유가 될 수도 있겠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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