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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손바닥 만한 땅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던 시대

by 초야잠필 2024.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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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경지를 fallow land 라 한다. 지력을 회복하고자 일정기간은 잡초 상태로 방치한다.

 

시대가 흘러 조선후기쯤 되면 손바닥 만한 땅이라도 

비료를 갈아 넣고 때려 부어 매년 농사를 지어 수확을 거두는 일이 가능했겠지만 

우리나라는 조선 전기까지도 휴한 농경이 극복이 안 되고 있었다. 

지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의 반드시 일정기간마다 농사를 쉬어야 했다는 말이다. 

이건 무슨 뜻이냐. 

손바닥 만한 땅 가지고 있는 이들이 그 땅 부쳐서 먹고 살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농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쉬는 땅과 농사짓는 땅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하니 

농사의 기본 단위가 커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휴한농경을 할 수 없는 소토지 소유자는 

어차피 그 땅 가지고 있어봐야 먹고살 수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휴한 농법이 토대로 되어 있는 사회는 

장원의 출현이 필연적이었다는 뜻이겠다. 

이는 무슨 소리냐 하면, 

고려말의 "겸병과 농장"은 

농업 기술의 당시 수준 상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다는 뜻이다. 

반드시 쉬는 땅이 있어야 하니 

농장처럼 큰 단위가 아니면 먹고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소농민,

자기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소농민은

땅을 강제로 뺏겨 농장에 몰입된 것이 아니라 

어차피 작은 땅떼기 가지고 있는 농민은 휴한농법이 주류인 한 

그 땅 가지고 있어봐야 먹고 살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했을까? 

이들은 십중팔구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작은 땅을 큰 농장에 기탁하고 

그 농장의 예농으로 땅을 부쳐먹었을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고려말 조선초에 자주 등장하는 겸병-농장의 성행은

토지제도가 문란해서 그런 게 아니고 

그 당시 농업기술 수준에서 그런 규모의 농장이 아니면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농장보다 훨씬 작은 단위로도 매년 수확을 거두는 소농민은

조선 중 후기나 되어야 나왔을 것이라 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작은 자기 땅에 농사지어 먹고 사는 소농민은

조선 중후기 때나 나온 것으로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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