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흘러 조선후기쯤 되면 손바닥 만한 땅이라도
비료를 갈아 넣고 때려 부어 매년 농사를 지어 수확을 거두는 일이 가능했겠지만
우리나라는 조선 전기까지도 휴한 농경이 극복이 안 되고 있었다.
지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의 반드시 일정기간마다 농사를 쉬어야 했다는 말이다.
이건 무슨 뜻이냐.
손바닥 만한 땅 가지고 있는 이들이 그 땅 부쳐서 먹고 살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농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쉬는 땅과 농사짓는 땅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하니
농사의 기본 단위가 커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휴한농경을 할 수 없는 소토지 소유자는
어차피 그 땅 가지고 있어봐야 먹고살 수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휴한 농법이 토대로 되어 있는 사회는
장원의 출현이 필연적이었다는 뜻이겠다.
이는 무슨 소리냐 하면,
고려말의 "겸병과 농장"은
농업 기술의 당시 수준 상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다는 뜻이다.
반드시 쉬는 땅이 있어야 하니
농장처럼 큰 단위가 아니면 먹고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소농민,
자기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소농민은
땅을 강제로 뺏겨 농장에 몰입된 것이 아니라
어차피 작은 땅떼기 가지고 있는 농민은 휴한농법이 주류인 한
그 땅 가지고 있어봐야 먹고 살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했을까?
이들은 십중팔구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작은 땅을 큰 농장에 기탁하고
그 농장의 예농으로 땅을 부쳐먹었을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고려말 조선초에 자주 등장하는 겸병-농장의 성행은
토지제도가 문란해서 그런 게 아니고
그 당시 농업기술 수준에서 그런 규모의 농장이 아니면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농장보다 훨씬 작은 단위로도 매년 수확을 거두는 소농민은
조선 중 후기나 되어야 나왔을 것이라 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작은 자기 땅에 농사지어 먹고 사는 소농민은
조선 중후기 때나 나온 것으로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늙어서도 공부하는 이에게 주는 공자님 말씀 (19) | 2024.07.25 |
---|---|
신석기시대 농경과 휴경 (14) | 2024.07.25 |
농사와 환경, 자연이란 말 가능키나 한가? (20) | 2024.07.24 |
한국학자는 누구를 대상으로 써야 하는가 (17) | 2024.07.24 |
메타인지metacognition가 중요한 60 이후 (16) | 2024.07.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