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영국사 은행나무
공자를 추숭하는 유교 학교를 흔히 행단(杏壇)이라 하거니와, 이는 공자가 제자들을 杏나무 아래서 교육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래서 이런 공자학교 마당에는 杏나무를 심는 일이 많아, 우리네 서원이나 향교 같은 마당에서 오래된 은행나무를 만나는 이유가 바로 이에서 말미암는다.
한데 杏이라는 글자는 언제나 논쟁을 유발했으니, 다름 아니라 은행나무라는 뜻도 있고, 아울러 살구나무를 의미하기도 한 까닭이다. 그래서 은행나무를 심을 것인가? 아니면 살구나무를 심을 것인가 하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공자의 고향 중국 산동성 곡부 문묘에는 살구나무가 있다.
조선에서는 은행나무가 압도적으로 많다. 한데 은행나무는 결정적인 하자가 있어, 가을철 꼬랑내가 문제였다. 지금도 가로수로 애용하는 은행나무는 이 꼬랑내 문제가 심각해, 숫나무를 심는 일이 많다. 조선 사람들이라고 그들이 별나서 은행 열매 꼬랑내가 좋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도 역시 그 냄새가 참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3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에 ‘태학(太學)의 은행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다(太學銀杏樹不實)’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일화다.
옛날 사람들이 행단(杏壇) 제도를 모방해 문묘(文廟) 앞에 두 그루 은행나무를 마주하여 심었는데, 그 열매가 땅에 떨어지면 냄새가 나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반관(泮官 성균관 관원)이 나무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 후로 다시는 나무에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이를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홍승균 (역) | 1999)
그러고 보니, 현재의 성균관 마당에 거대하게 자라는 은행나무가 열매를 맺는지 아닌지 내가 확인하지 못했다. 혹, 그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알려주었으면 한다.
덧붙임) 주변 지인 몇 사람이 알려준 바에 의하면, 이 대성전 마당 은행나무는 숫나무라, 은행이 열리지 않는다 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도 은행 꼬랑내로 고생하는 경험과 어우러져 이런 이야기가 생겨났음을 추찰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은행나무가 수술을 감행한 트란스젠더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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