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를 즐긴 실학자(펀글. 심경호)
출처 : 실학산책, 제19호 (2006.10.18)
판타지를 즐긴 실학자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연암 박지원은 시를 별로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영대정잡영(映帶亭雜詠)」에 「수산해도가(搜山海圖歌)」라는 기이한 제목의 장편시를 남겼다. 박지원은 언젠가 큰 형 박희원(朴喜源, 1722-1787), 종제 박수원(朴綏源, 1738-1811) 및 이덕무와 현원(玄園)이란 동산에 노닐면서 거대한 크기의 <수산해도(樹山海圖)>를 펼쳐 놓고 감상하였다고 한다. 시의 서문은 이렇다.
“여름날 형님을 모시고 종제 이중(履仲, 綏源)과 함께 덕보 무관(이덕무)과 약속하고는 현원에 노닐었는데, 각각 명품[翫]을 하나씩 내놓고 비교하기로 하였다. 이 그림 축의 길이는 거의 화살의 비거리 만하였다. 동산에 펼쳐두고는 여러 사람들이 이리저리 다니면서 구경하였다(夏日奉伯氏及從弟履仲, 約德保懋官, 遊玄園, 各出一翫, 以較之. 此軸延 , 幾竟一帿地. 張之園中, 群行而翫之).” 원문에 완(翫)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곧 오늘날로 말하면 명품이다. 다만 오늘날 말하는 허세 부리기 위한 사치품이 아니라 고동서화(古董書畵)였을 듯하다.
연암 무관 등, 모여서 명품을 감상하다
박지원이 감상한 <수산해도>는 이랑신(二郞神)의 요괴퇴치 전설을 모태로 설화 및 소설의 세계를 끌어들여 갖가지 형상을 그리는 <수산도(搜山圖)> 계보의 그림이던 것 같다.
이랑신은 관구이랑(灌口二郞)이라고도 하며 중국 민간에 전하는 치수의 신이다. 그 출신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진(秦)나라 촉군태수 이빙(李氷)의 둘째아들로 부친의 치수사업을 도와서 성도 남쪽에 흐르는 민강(岷江)의 교룡을 참하였다고도 하고, 수(隋)나라 가 주태수 조욱(趙昱)이 교룡을 참하여 우환을 제거한 뒤 신령이 된 것이고도 한다. 『서유기』와 『봉신연의』에는 옥황상제의 여동생이 하계에 내려가 양씨 성을 가진 남자에게 시집가서 낳은 아들이 여섯 괴물을 죽이고 도산(桃山)을 쪼개는 신통력을 지녀 그를 관구이랑이라 하였다고 한다. 혹은 불교에서는 사대천왕 가운데 하나인 북방의 다문천왕에게 속해 있던 비사문의 아들 독건(獨健)을 가리키며, 천병을 이끌고 당나라 명황을 구해준 공이 있다고 한다.
박지원이 본 그림은 <수산도> 계보를 이은 것에 틀림없지만 <수산해도>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 회화는 아직 본 일이 없다. 박지원은 그 그림을 왕적(王迪)이란 사람이 그렸다고 하였다. 그림의 일부는 에로틱하기까지 하다.
한 아내는 화살에 뻗은 두 팔이 꿰여 있고, 一妻箭中兩臂伸
한 아내는 매가 채 가는데 오른쪽 눈썹이 기울어 있다. 一妻鷹攫右眉
한 아내는 아이를 안고 트레머리를 붙잡고 도망가는데, 一妻抱兒奉 走
아이가 여전히 젖을 빨고 있자 아이를 꾸짖는다. 兒猶 乳嗔其兒
박지원과 이덕무가 길게 뻗은 그림을 이러 저리 다니면서 감상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들은 일상을 벗어난 신비의 세계로 몰입하여 즐거움을 누렸을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한 여름 더위라도 식힐 겸해서 판타지나 에스에프 영화를 보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박지원은 이렇게 판타지를 즐길 줄 알았기 때문에 열하에서 환희(幻戱)를 감상하고 또 『열하일기』에 환희의 공연목록을 적어둘 수 있었던 것이다.
진실한 ‘탐구의 학’, 정신적 여유 있어야 가능
실학이라고 하면 어린 학생들도 금방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를 손꼽는다. 이런 개념들이 정착되기까지 여러 선배 학자들이 정말 많은 연구를 해오셨다. 최근 실학의 기원에 관해 그 근대주의론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으나, 실학의 근본 개념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실학에 대해 지나치게 경직된 ‘방어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학자들이 직접, 간접으로 현실에 참여할 것을 표방하고 실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목석같이 고정관념으로 사회참여를 한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실학자들은 권력화된 학문과 일체의 거짓 학문에 대해 비판하면서 진실한 ‘탐구의 학’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탐구의 학은 정신의 여유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 정신적 여유가 판타지의 감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은가?
박지원은 그림을 본 뒤로 잔상이 사라지지 않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나도 집에 돌아왔으나 눈앞에 삼삼하여, 밤에도 잠 못 이루고 생각이 그것에 머물렀다(我亦歸家眼森森, 宵不成寐念在玆).” 아니, 이쯤이면 실학의 대가 박지원을 ‘폐인’클럽에 받아들여도 좋지 않을까?
글쓴이 / 심경호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 한얼미디어, 2006
『한시의 세계』, 문학동네, 2006 등 다수
· 역서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 태학사, 2001
『중국 고전시, 계보의 시학』, 이회문화사, 2005 등 다수
'역사문화 이모저모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홍도의 집에 부친 이용휴의 글〔對右菴記〕 (0) | 2018.02.26 |
---|---|
200년만에 빛을 본 《대동운부군옥》 (0) | 2018.02.26 |
벼루광 유득공(안대회 글) (0) | 2018.02.26 |
은행나무 꼬랑내 (0) | 2018.02.26 |
아버지, 시아버지, 남편을 전쟁에 잃고 (0) | 2018.02.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