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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조선총독부 시정25년사가 정리한 3.1만세운동

by taeshik.kim 2024.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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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국에 대한 조치

1914년(大正 3) 8월 구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일본제국은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 리제국과의 국교를 단절하였고, 선전宣戰의 조칙이 내려졌다.

이에 데라우치 총독은 특 별히 유달諭達(8월 24일)을 발표하여 관내 일반 관민에게 고하였다.

여기서 충실히 성의 聖意를 받들어 봉공奉公의 정성을 다하고, 제국의 위무威武1)를 신뢰하여 냉정하게 본업 에 힘쓰며, 유언비어를 경계하여 인심의 동요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일반 인민에게 경거망동을 깊이 경계시키는 한편, 신문·잡지 등의 기사에 대 해서는 경무총감부를 통해 엄중히 단속하게 하였다. 

당시 인심이 다소 흥분되는 조짐이 있었지만, 교주만膠州灣의 함락(1914년 11월 7일 開城)과 함께 민심이 완전히 평온하게 되었으며, 이후 오히려 일반에서 제국의 위무威武를 신뢰하는 생각이 두터워졌다.

또 반도에 거주하는 적국민敵國民에게도 최대한 보호의 방도를 강구하였다.

그런데 [303] 유럽의 전황이 더욱 확대되자, 일부 불량한 무리들은 국권회복을 빙자하여 기만적인 행위를 감행하거나 우리는 제국 신민이 아니라고 하면 서 납세를 거부하였다.

또 시국의 추이를 제멋대로 판단하여 무모한 행동을 기도하거 나, 재외 조선인의 교사敎唆에 응해 우민愚民을 선동하거나 협박하여 금전을 빼앗는 자들이 생겨났다.

따라서 이들은 조금도 가차 없이 검거·소탕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동(이상 295쪽)시에 비밀결사 단속에 주도면밀한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해륙 양면에서 끊임없이 불령배不逞輩의 잠입을 경계했다.





3) 소위 ‘만세소요사건’

(1) 그 원인 

이상과 같이 불령 도배들은 반도에 몸을 둘 곳이 없어, 그 일부는 이전 부터 상해를 근거로 해서 몰래 책동하고 있었다.

1917년(大正 6) 8월 스웨덴2)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만국萬國 사회당 대회가 열리자, 재외 조선인 신규식申圭植은 조선사회당 대표를 자칭하며 이 대회에 출석해 조선의 독립을 희망한 적이 있었다. 

그해 9월에는 뉴욕에서 25약소민족회의가 열리자 박용만朴容萬이 여기에 참석했다. 1918년(大正 7) 11 월 11일 연합국 각국의 대독일對獨逸 휴전조약이 성립되고, 다음 해인 1919년(大正 8) 1월부터 마침내 5대 강국(일본·영국·미국·프랑스·이탈리아)이 평화 공작에 들어갔다. 

그러자 미국 대통령 윌슨은 몸소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의 예비 평화회의에 출석하여, 강 화의 기초 조건으로 제출했던 14개조 중 민족자결주의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여러 관계국들이 수락하자 일반적으로 국가를 아직 형성하지 못 한 여러 민족에게 상당한 충동을 주었다.

이에 이들 민족은 파리 예비 평화회의의 효과를 유리하게 전개시킬 수 있을 것으로 속단하여, 이 새로운 세계 개조의 기운은 힘으로 싸우지 않더라도 일본정부에 새로운 국가의 독립을 허용하게 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 였다.

이러한 오해는 [304] 조선인 사이에 점차 높아졌다.  

이에 상해를 중심으로 한 재외 불령선인不逞鮮人은 조선의 독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을 규합하고 내외에서 상응하여 그 의사를 세계에 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1919년(大正 8) 1월 하순 몰래 사람을 도쿄와 조선에 파견하여 선전을 시도하고, 반도에는 장덕수張德秀 등이 들어와 천도교도·기독교도를 선동했다.

그래서 조선의 독립을 이미 프랑스 파리의 예비 평화회의에서 열국이 승인하였다는 소문도 성행하였다.

특히 구주전쟁의 종국終局을 전후해서 세계 사조의 변동에 자극받아, 일부 조선인 사이에서는 세계의 대세를 분별하지 못하고 독립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깨닫지 못해 여기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따라서 위의 소문 등에 잘못 이끌려 인심(이상 296쪽)


2) 원문은 네덜란드和蘭國로 되어 있으나, 1917년 9월경 개최된 만국 사회당 대회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개최되었다.

이 동요하게 되었다. 역시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이 간다구神田區 오가와정小川町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최팔용崔八鏞 주최하에 독립운동회의를 개최하고, 독립청원서·결의문 등을 작성해서 귀족원貴族院·중의원衆議院과 각국 대사·공사, 각 신문사에 우송한 사건이 발발했다.

또 당시 반도의 천도교 신도는 100만에 이르러, 교주 손병희孫秉熙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는데, 간부 최린崔麟 등은 교주 손병희를 움직였다. 이에 일대 음모를 획책하여 기독교 및 불교 교도 중의 몇몇과 결탁하고, 또 학생·귀족 등도 꾀어내어 동지로 삼았다.

이때 마침 1919년 1월 22일 서거한 고종의 국장國葬을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경성이 매우 혼잡했던 것을 틈타, 3월 1일을 기해 행동을 개시하였다.

(2) 경과

이 소요사건은 3월 1일 경성·평양·진남포·선천·의주·원산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시위운동을 개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자 손병희를 비롯한 수령 29인(수령은 이 외 4인이 더 있었지만 결석)이 요정에 모여 축배를 들려고 할 즈음 [305] 모두 관헌에게 포박되었는데, 이것으로 운동은 소멸되지 않았다.

독립선언서와 기타 불온 문서는 청년학생 등에 의해 각지에 살포되었고, 점차 협박이 무지한 하층 계급에게 미쳤다.

그리하여 독립과 관련한 유언비어가 일시에 전파되었는데, 그 근거는 상당히 박약하였다.

즉 그들은 독립이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잘못 알고 다수가 군집 또는 행진하며 만세를 제창하거나, 혹은 독립이 되는 날 다 른 지역의 압박을 받을 것을 걱정하여 만세를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

또 자기 지역에서 만세 소리가 없는 것은 주민의 치욕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미국의 응원을 기대하여 도처에서 부화 망동한 경우도 있었다.
이 사건을 보통 ‘독립만세소요사건’이라 부른다.

소요 발생의 초기에는 두세 차례 폭행을 행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온화하고 소극적인 수단을 취하여 위와 같이 만세를 제창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일이 경과하면서 그 성격이 악화되어 점차 폭동의 색채를 띠었다.

그리하여 혹 관청·면사무소 등을 습격·파괴하거나 경찰 관헌, 지방 관공리 등을 구타·살상하는 자가 있었으며, 3월 하순부터 4월 상순까지 가장 극심하게 창궐했다.

그런데 4월 10일 전후부터 그 기세는 점점 꺾여 4월 말에 이르러 거의 종식되었다.

각 도 중에서도 소요가 격심했던 곳은 경기도·황해도·평안남북도·경상남도였고, 그 다음은 경상북도·충청남북도·함경남도였다.

강원도·함경북도에서도 약간의 소요가 있었으며, 전라남북도는 다른(이상 297쪽) 도에 비해 상당히 미약했다.3) 




이리하여 소요는 60일에 걸쳐 연 617곳에서 일어났고, 참가 연인원은 무려 58만 7,000여 명에 이르렀다.

폭동을 일으킨 민중의 사상자는 약 2,000명,4) 군대·헌병·경찰과 기타 사상자는 약 200명, 파괴된 관공서 및 민가는 약 200곳에 달했다.


(3) 조치 

① 소요의 진정과 관련해서는 수차례 유고를 발표하여 유언비어가 전혀 근거가 없고 [306] 제국의 반도 통치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임을 타일러 민중의 각성을 촉진했고, 관공리·지방 유력자 등에게 민심의 선도 및 수습을 담당하게 하였다. 

동시에 이를 평정할 때에는 절대적으로 온화한 수단을 취하였고, 집단이 지나치게 크고 또 대단히 악화되어 경찰력 부족으로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 그 지역의 수비병을 파견하여 경계하게 하였다.

② 소요가 점차 확대되어 흉기를 가지고 관공리를 협박하여 관문서官文書를 소각하고 청사 기물을 파괴하는 등 폭동이 극심한 지방에는 일시 군대를 배치해서 양민의 보호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에 의해 극심하게 창궐했던 각지의 소요도 갑자기 그 기세가 꺾여 얼마 안 되어 완전히 진정되었다.

그렇지만 민심은 여전히 평정되지 못하고 불안한 정세는 상하에 가득 차, 선동·협박 등의 불상사가 도처에서 빈발하는 상황이었다.


(4) 유식자의 태도와 사후 민심

소요가 일어나자 상·중류 인사와 조선인 관공리, 지방 유력자 등은 대체로 신중한 태도를 취하여 이에 참가하지 않고, 혹 공공연히 의견을 발표하여 독립운동에 반대하거나 자제단自制團 조직을 제창하며 선동·협박을 배척하였다.

혹은 각지를 순회하며 민중을 훈계하거나 일신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소요 제 지에 노력하기도 하였다.

부화뇌동하는 자들의 대다수를 점하는 하층 농민과 노동자 등도 전 도의 총수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소요가 격심한 때에는 협박과 후환이 두려워 애매한 태도를 취한 자도 적지 않았지만 진정된 후에는 오히려(이상 298쪽)

3) 전라남북도는 한말에 의병투쟁이 가장 격렬했던 곳으로,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에 의해 많은 의병장이 희생
되었기 때문에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할 만한 인적 역량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4) 1919년 9월 29일 조선군사령관이 일본 육군대신에게 보낸 ‘조선소요사건에 있어서의 死傷數의 건 보고’라는 보고서를 보면, 조선인 사망자는 405명, 부상자는 903명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도 스스로 이 숫자 는 정확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관헌을 신뢰하는 생각이 깊어졌고, 또 전에 부화뇌동했던 자도 참으로 독립은 불가능 한 것이라 하고 일시 현혹되어 미혹되었던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5) 치안유지에 관한 법규 제정 병합 이전 치안유지와 관련된 법규로는 일본인에게 만 적용할 목적으로 1906년(明治 39) 4월 통감부령으로 발포된 ‘보안규칙’과 조선인에게 만 적용할 목적으로 [307] 1907년(光武 11) 7월 제정된 ‘보안법’이라는 법률이 있었다. 

그리고 모두 1910년 제령 제1호에 의해 한국병합 후에도 제국의 법령으로서 아직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규정에 충분하지 않은 점이 있었기 때문에 1919년(大正8) 3월 ‘조선 독립소요사건’ 발생을 계기로, 정치 기구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불온 행동을 진압할 목적으로 그해 4월 제령으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을 공포하고5) 이러한 행위를 엄중하게 단속하였다. [308] (이상 300쪽) 

출처 : 국역 조선총독부 30년사(상), 박찬승·김민석·최은진·양지혜 역주 | 민속원 | 2018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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