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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69

너무 잘난 형을 둔 흠순欽純 (3) 너무 다른 형제 잘난 형한테서 동생이 살아남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전통적으로 선호한 방식이 다르게 가기다.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형을 둔 김흠순이 딱 이랬다. 아, 이를 보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사안이 있다. 동생이 형을 어찌 생각했느냐다. 나는 앞서 누차에 걸쳐 내가 친한 영웅은 없다는 말 입이 아프도록 했으며, 그 대표가 예수였다는 말도 지겹게 했다. 내가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어찌 나한테 영웅일 수 있겠는가? 볼 거 안볼 거 다 본 처지에 나랑 똑같은 그가 어찌 나를 이끄는 영웅이 되겠는가? 화랑세기 흠순공 전에 보이는 대목이다. “사람들이 모두 유신공을 두려워하고 공경했지만 공만은 홀로 그러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어리석은 형이 무에 두려운가?’” 어때? 내 말이 딱 맞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흠순은 .. 2023. 6. 16.
너무 잘난 형을 둔 흠순欽純 (2) 상처가 된 낭비대첩 7세기 한반도는 사생결단하는 전쟁의 시대였다. 삼국이 서로, 혹은 밀착하고선 그 외부 세계까지 끌어들여 어느 하나를 종말하고자 하는 시대였으며, 그 궁극하는 귀결이 신라에 의한 일통삼한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백제 함몰이 있기 전 신라는 고구려와 대판하는 전쟁에 돌입하곤 했으니, 7세기 전반기 낭비 대전娘臂大戰은 개중에서도 양국이 전력을 투입한 총력전이었다. 이 전쟁은 신라에 의한 도발이었다. 즉위 50주년을 몇 년 앞둔 건복建福 46년, 서기 629년 스산한 가을 기운이 한반도를 감돌기 시작한 그해 8월, 이 작전을 치밀하게 준비한 신라왕 김진평은 마침내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발동한다. 신라가 이 전쟁을 어찌 생각했는지는 그 화려한 수뇌부 진용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총사령관에는 이찬.. 2023. 6. 15.
너무 잘난 형을 둔 흠순欽純 (1) 형을 찾아가 조언을 구한 동생 형이 아니었더래면, 형만 없었더래면,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 자신은 이런 식으로 통탄했을지 모르나, 그 잘난 형을 빌어 출세가도를 달리기도 했다는 사실을 망각한 푸념 아니겠는가? 그래도 그 잘난 형이 아니었더래면, 삼국사기 열전 첫머리는 내가 장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하에서 통곡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열권에 지나지 않는 그 전체 열전 중 첫 세 권을 몽땅 형이 가져갔으니, 아무리 김부식이라도 그렇지 이런 파격은 너무하지 않겠는가? 그 잘난 형 때문에 어쩌면 가장 심하게 저평가되었을지도 모르는 김흠순金欽純. 삼국사기 권 제42 열전 제3 김유신(下)에는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킨 문무왕이 그 진용을 짜면서 총사령관에 김유신을 앉히고, 그를 보좌하는 부사령관 양날개로는 김흠순과 김인문을 .. 2023. 6. 14.
풍질로 주저앉은 총사령관 김유신 감국監國이란 글자 그대로는 나라를 돌본다는 뜻이니, 이는 비상시에 군주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그것을 대리하는 일을 말한다. 보통은 다음 보위를 이을 세자나 태자가 하지만, 그가 어리거나 병들거나 했을 적에는 중신(重臣) 중에서 명망이 높인 이를 골라 맡기기도 한다. 명망이 높아야 하는 까닭은 그래야 비상사태에 반란을 억누를 수 있는 권위와 힘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 이런 감국이 흔했을 것이나, 역사에서 확인하는 실례는 거의 없으니, 이는 기록의 소략함에서 기인한다. 그런 가운데서 역시나 김유신이 감국을 한 일을 발견할 수 있으니, 668년 고구려 정벌 전쟁에서 그가 수도 계림(혹은 금성이라도 했다)에 남아 감국을 했음이 확실하다. 문무왕 김법민은 아들을 늦게 본 듯하다. 삼국사기 문무왕본기 5.. 2023. 6. 9.
나라를 비운 왕과 태자, 감국監國하는 김유신 문무왕본기엔 대 고구려 정벌 전쟁에 김유신이 풍질로 직접 참가치는 못했다 하지만 같은 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3 김유신 하에는 그와는 언뜻 다른 듯한 사정이 거론됐으니, 병이 아니라 문무왕의 뜻에 따라 수도에 머물렀다 한다. 간단히 추리자면 나까지 수도를 비웠다가 수도에 무슨 일이 생기는 비상사태에 대처할 인물로는 김유신 밖에 없으니 그래서 문무왕이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감국의 역할을 김유신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이는 해당 열전에 보이는 다음 기술, 그러니깐 출정에 앞서 김유신을 대신하여 총사령관 역할을 대신할 장군 김흠순과 김인문을 불러 문무왕이 하는 다음 언급에서 명확하다. “공들 세 신하는 나라의 보배이니, 만약 한꺼번에 적의 땅으로 갔다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 돌아오지 못한다면.. 2023. 6. 9.
총사령관 임말리任末里를 희생한 김유신의 출세작 낭비성 전투 진흥왕 시대에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혹독했다. 이후 신라는 서쪽에선 백제, 동북쪽에서는 고구려의 협공에 내내 시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반도의 이런 정세 변동은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도 영향을 주어 수당 왕조가 한반도 문제에 깊숙히 개입하는 단초를 마련했으며, 백제는 바다 건너 왜와 결탁을 강화하니,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은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흔든 대사건이었다. 이 와중에 신라와 고구려는 629년 가을 8월, 낭비성娘臂城이라는 곳에서 국운을 건 일대 혈투를 벌이게 된다. 이 사건 전개를 삼국사기에서 훑어보면 먼저 신라 진평왕본기 51년(629) 조에 이르기를 “가을 8월, 임금이 대장군 용춘龍春·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했다. 고구려인이 .. 202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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