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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13

유오산천遊娛山川 무원부지無遠不至, 신라 화랑의 전매특허 "遊娛山川, 無遠不至" 산과 강을 노닐며 아무리 멀어도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삼국사기》 진흥왕본기가 저록한 신라 화랑 특징이다. 이에서 산은 말할 것도 없이 명산名山이요 천川은 대천大川이다. 이를 보고도 화랑 무리가 오두미도五斗米道를 신봉하는 천사도天師道 도교道敎 무리가 아니라는 주장은 부처를 섬기는데 불교도가 아니며, 예수를 섬기는데 기독교도가 아니라는 주장과 같다. 너무나도 분명한 이 특성을 도대체 왜 인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명산대천 찾아다니는 일이 도교 아니면 무슨 개뼉다귀리오? 2019. 4. 23.
화랑, 그 설치와 폐지와 부활의 변주곡 1. 신라의 독특한 제도인 화랑花郞은 진흥왕 때 창설되었으니 이 화랑은 그가 이끄는 일군의 군사적 성격이 강한 집단의 우두머리를 지칭하거니와 2. 그를 일러 화랑花郞이라 하기도 하고 풍월주風月主라고도 하며, 국선國仙이라고도 했으니, 이 차이가 무엇인지 애매했거니와 그럼에도 종교 성향으로 보건대 풍월주와 국선은 말할 것도 없이 그가 도교 오두미교 천사도 계통임을 명칭으로써 안다. 3. 한데 이런 화랑은 전신이 있어 남자인 화랑에 대비되어 여성이라 그를 원화原花라 했다. 이 원화가 두 명이었는데 질투가 심해 서로 머리 끄댕이 잡고 쌈박질하다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청부 살인하고는 시멘트에 묻어버렸다. 4. 이 사건이 폭로되어 이에 열받은 진흥왕이 여자는 안되겠다 해서 남자로 하자 해서 그를 세우고는 이름하기를.. 2019. 4. 7.
원화 폐지와 그에 따른 화랑 설치 그 비밀이 일거에 풀린다 신라가 화랑(花郞)을 설치한 시점을 두고 논란이 적지 않았으니,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다음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 조 다음 대목에서 비롯한다. "三十七年春 始奉源花" (37년 봄에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이 대목이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이렇다. "三十七年, 始奉原花爲仙郞" (37년,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어 선랑으로 삼았다) 그에 대해 《삼국유사》는 권 제3 탑상(塔像) 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彌勒仙花 未尸郞 眞慈師)〉에서 진흥왕 37년에 원화 혹은 선랑, 곧 화랑을 처음 설치한 문제를 지적하면서, 연대가 틀렸다고 지적질했으니, "國史 眞智王大建八年丙申 始奉花郞 恐史傳乃誤"(국사에서 이르기를 진지대왕 대건 8년 병신에 처음으로 화랑을 받들었다 했거니와, 이는 아마도 사.. 2019. 4. 5.
영랑(永郞) 신라 중기 때 화랑임은 확실하나, 자세한 행적과 활동연대 등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준영랑(俊永郞)의 줄임말인 듯한데 이 또한 확실치는 않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백률사(栢栗寺) : 부례랑을 봉하여 대각간(大角干; 신라의 재상 작명爵名)을 삼고, 아버지 대현(大玄) 아찬(阿喰)은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삼고, 어머니 룡보부인(龍寶夫人)은 사량부(沙梁部)의 경정궁주(鏡井宮主)를 삼았다. 안상은 대통(大統)을 삼고 창고를 맡았던 관리 다섯 사람은 모두 용서해 주고 각각 관작(官爵) 오급(五級)을 주었다. 6월 12일에 혜성(彗星)이 동쪽 하늘에 나타나더니 17일에 또 서쪽 하늘에 나타나자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것은 현금과 신적을 벼슬에 봉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입니다.” 이에 신적을 책.. 2018. 3. 23.
부례랑(夫禮郞) 판본에 따라 실례랑(失禮郞)이라고도 하니, 글자 모양이 비슷한 데 따른 혼동이다. 신라 신문왕 때 화랑으로 문객 1천 명을 거느렸다. 북쪽 금란(金蘭)으로 갔다가 인근 적국 사람들한테 사로잡혀 목축에 사역됐지만, 신이한 행적으로 돌아왔으니, 이 일을 기념해 만파시적을 만만파파식적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 제2 기이 2 만파식적 :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기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太子) 리공(理恭·효소대왕孝昭大王)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는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玉帶)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했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이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오... 2018. 3. 20.
검군(劍君) 진평왕 시대 신라인으로 사량궁 사인으로 있으면, 다른 사인들이 관청 곡식을 몰래 빼돌리는 일에 가담하지 않아 그들에게 독살됐다. 근랑(近郞)이라는 풍월주를 따라 수양하면서 의로운 것이 아니면 사사롭게 취할 수 없다는 신념을 익혀 이를 실천에 옮겼다. 삼국사기 권 제48(열전 제8) 검군 열전 : 검군(劍君)은 대사(大舍) 구문(仇文)의 아들로 사량궁(沙梁宮)의 사인(舍人)이 되었다. 건복(建福) 44년 정해(진평왕 49: 627)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여러 농작물을 말려 죽였으므로 다음 해의 봄으로부터 여름까지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끼니를 메웠다. 이때 궁중의 여러 사인(舍人)들이 함께 모의하여 창예창(唱倉) 곡식을 훔쳐 나누었는데 검군만이 홀로 받지 않았다. 여러 사인이 말하기를 “.. 2018.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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