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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507

[기념품이 된 피양 명물](1) 대동강 벼루 JBBK? 잉크와 펜, 연필 따위가 없던 시절 우리네 조상들이 종이나 비단 같은 데에 글씨를 쓰려면 벼루에 먹을 갈아 붓을 적셔야만 했다. 그런 만큼 '벼루'란 문인의 방에 있어야 할 네 가지 보배(문방사보) 중 하나로 존중받았다. 도자기나 기와, 심지어 쇠나 나무로 만든 벼루도 없잖으나, 대부분의 벼루는 돌을 캐서 깎아 만든다. 돌의 성질에 따라 먹이 갈리는 정도가 달라지므로 어떤 돌로 벼루를 만드느냐도 중요한데, 대개 벼루 면에 미세한 요철(봉망)이 있어 먹이 잘 갈리고 먹빛이 잘 우러나며 점도가 적당한, 이른바 발묵이 좋은 걸 "좋은 벼룻돌"이라고 일컫는다. 중국에선 단계석이나 흡주석, 일본에선 시모노세키 쪽 적간관석을 고급으로 친다. 우리나라 벼룻돌로는 압록강가 평안북도 위원의 위원화초석, 두만강가 함경북도.. 2024. 11. 11.
부인이 집안에선 내상內相 17세기 영남 문인이었던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1553~1634)이란 분 문집을 찾아볼 일이 있어서 잠깐 들여다보다가 재밌는 표현을 발견했다. 어떤 이의 부인을 '내상內相'이라고 일컫고 있는 것이다. 내재추內宰樞, 내부대신內部大臣의 준말을 '내상'이라고도 하는 모양이지만, 이때는 그런 직제가 있을 리 없다. 당나라 때 육지陸贄라는 이가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국정에 직접 참여하여 정승처럼 국사를 좌지우지했다는 데서 그를 '내상內相'이라고 일컬었다는데 혹 여기서 땄을까? 하지만 그 대상이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여기의 '내상'은 말 그대로 '집안의 재상'이라 풀어야겠다. '집안의 재상'이라... 그러면 남편은 집안의 군주인가? 군약신강君弱臣强... 아 여기까지만. 요즘도 간혹 어머님 혹은 아내를 '내무부장관.. 2024. 11. 4.
고구려 고분벽화를 우키요에 판화로 재해석한 일본화가 마쓰다 레이코松田黎光(1898~1941) [마쓰다 상, 고구려 벽화를 그리다] 의 마쓰다 세이코나 "오사카에 사는 사람들" 유튜브로 유명해진 마쓰다 아키히로 같은 이들이 있어서, 소나무 송松자에 밭 전田자를 쓰는 '마쓰다松田'가 일본 성인 건 요즘 잘 알려졌지 싶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들어와 살던 일본인 중에도 '마쓰다' 아무개는 적잖이 있었다. 개중 마쓰다 레이코松田黎光(1898~1941)라는 이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화가였다. 레이코는 호號고 이름은 마사오라고 하는데, 호를 이름처럼 썼던 모양이다. 교토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경성에 한 20년 넘게 살면서 주로 조선 풍속이나 문화유산을 소재로 한 시리즈 작품을 많이 남겼다. 앞 그림도 그런 시리즈 중 하나다. 평안남도 용강에 있는 고구려 고분 쌍영총(쌍기둥무덤) 벽화 한 부분을 그렸는데.. 2024. 11. 2.
겨울 고갯마루 우뚝한 소나무 한 그루 겨울 산마루엔 우뚝한 솔 한 그루 [冬嶺秀孤松]중국 동진시대 시인 도연명(365~427) 시 사계절[四時] 마지막 구절이다.뜻만으로도 한기가 느껴지는데 소암 현중화(1907~1997) 글씨로 보니 폰 안에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부는 듯 하다.*** editor's note *** 도연명 사시四時는 다음과 같다. 春水滿四澤 봄 물은 사방 못에 가득가득夏雲多奇峰 여름 구름 기이한 봉우리에 많네秋月揚明輝 가을 달은 밝은 빛 뿜뿜하고冬嶺秀孤松 겨울 산마루엔 우뚝한 솔 한 그루 2024. 10. 30.
밀양 영남루에 을축년에 세운 일본식 밀양박씨 중시조비 웬 일본식 석물들인가 했더니 비석에 '밀성대군지단密城大君之壇'이라 새겨져 있었다. 신라 경명왕의 아들로 '밀성대군'이었던(신라 때 왕의 아들을 '대군'으로 봉한 적이 있는지는 잠깐 젖혀두고) 밀양박씨 중시조 박언침이란 분을 기리는 단소壇所다. 근데 아무리 봐도 일본풍 산소 느낌이라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비석을 몇 자 읽어보니, 비를 세운 때가 신라기원 1982년 을축, 곧 1925년이다. 그리고 비 앞의 전서를 쓴 이는 완산完山 이강李堈이라 했으니 고종황제의 아들 의친왕이다. (2021. 10. 27) 2024. 10. 28.
저 놈을 '풍덩'하지 않고 뭐하는 게야 저 놈을 '풍덩'하지 않고 뭐하는 게야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보면 유달리 '물에 던져버리는' 형벌이 많다. 허리가 꺾여 가마솥에 들어가 물에 던져진 의종, 동지들과 함께 묶여 강물에 던져진 만적, 유배를 가다가 바다에 던져진 김경손, 길흉을 잘 점친다고 바다에 던져진 백량... 조선시대에는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가마솥에 들어가는 팽형烹刑 빼고) 물에 던져지는 형벌이 없었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 중천왕 후궁인 관나부인貫那夫人(?~251)이나 익선의 아들 정도밖에 모르겠는데 유달리 고려시대에 이런 수장형水葬刑이 많았던 것은 어떤 이유일지? 인류학적으로 이건 어떤 의미가 있을지? 2024.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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