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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의 미라

마왕퇴 (6): 소하와 문화혁명

by 초야잠필 2023.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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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 연구의 이해는 문화혁명에 아주 깊이 얽혀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문화혁명의 절정기에 중소분쟁이 격화한 그 와중에 마왕퇴 무덤이 발굴되었고, 

무려 2천년전 한 제후왕의 완벽하게 보존된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것 때문에 

이 사건은 처음부터 정치적인 성격으로 비화할 확률이 높았다. 

그냥 문화유적과 유물은 그렇게만 봐주면 될 것을 

당시는 문화혁명 와중이라 이에 정치적인 색깔을 덧씌워 
마왕퇴 무덤은 반동영주계급의 소산이요, 마왕퇴 미라는 호의호식한 여편네 정도로 폄하되어 

원래 같으면 홍위병 습격으로 몽땅 태워질 판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마왕퇴 발굴이 그렇게 막장으로 가지 않고 결국 세계를 놀라게 한 의학조사까지 성공리에 마친 것은

어쨌건 그 미친 세상의 와중에도 제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겠다. 

마왕퇴 보다는 조금 앞세대이지만 초한쟁패기야말로 역시 중국사 미증유인 난장판의 효시라고 할 만한데, 

이전까지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던 이들이 몽땅 개천에 쳐박히고 그 자리를 농민과 건달들이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런 이들 중 하나가 바로 마왕퇴 무덤에 묻힌 장사왕 승상인 대후轪侯 일가였다 하겠다. 

흔히 이전까지의 전적을 모두 태워먹고 문화의 단절이 있었던 것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라 하지만, 

사실 초한쟁패기 때 국가운영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던 이들이 대륙을 질주하며 다 때려부수는 동안 

그 이전까지 있던 문명의 산물은 남김없이 사라졌다고 봐도 되겠다. 

이런 난장판 와중에도 소하 같은 인물이 나와서, 

유방이 관중에 입관하자 가장 먼저 진나라 도서 일체를 접수하여 
이후 초한쟁패전에 유리하게 사용했다는 것은 

반문명적 광풍의 와중에도 오직 소하가 이를 지키는 역을 자임하였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楚后怀王让刘邦攻取关中,刘邦攻克咸阳后,诸将皆争夺金、帛、财物,萧何却独入府库内寻找秦国各种内政资料,接收了秦丞相、御史府所藏的律令、图书,掌握了全国的山川险要、郡县户口,并知民间疾苦,对日后制定政策和取得楚汉战争胜利起了重要作用,使刘邦对于天下的关塞险要、户口多寡、强弱形势、风俗民情等等都能了若指掌。

중국사에서는 이후에도 이런 주기적인 난장판의 역사가 반복되어 야만적 문명파괴가 재현되었는데

이 때마다 그 흐름에 저항하던 사람들이 계속 나왔고 그런 이들이 마왕퇴 발굴에서도 존재했었다 할 수 있다. 

이들은 마왕퇴 연구를 중단시키고 때려 부수고자 하는 당시 문화혁명의 책동을 어거지로 누르며 나갔는데, 

그 이야기는 이제부터 천천히 적어 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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