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신석기시대에는 농경이 없고 청동기시대에야 본격적으로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정설의 위치를 차지한 것으로 안다.
물론 이런 주장도 최근에는 많이 바뀌어 신석기시대에도 초보적 농경이 시행되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고 들었다.
왜 신석기시대 한국의 농경은 그렇게 미흡하게만 보이는 것일까?
필자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시비 곧 거름이 없던 시대에 지력이 떨어지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해 다시 지력이 떨어질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농사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앞에서 이야기한 이런 "화전식 순환농경"은 소위 말하는 문명 중심지에서는 빨리 극복되거나 아예 경험하지 않고 넘어가기도 했던 것 같다.
왜?
그것이 바로 토지 비옥도의 차이다.
주기적으로 범람하여 비료도 필요 없이 농경지를 덮어버리는 이집트나 황하유역 등지에서는 한국처럼 계속 순환하며 화전 경작해야 하는 시기를 빨리 벗어난 것 같다.
한군데에 정착하여 인근의 경작지에서 농사짓는 시기로 빨리 진입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토지 비옥도가 떨어지고 척박한 한국의 경우 순환화전의 시기를 중국보다 더 오래 경과한 것 아닌가 싶다.
필자가 보기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생각하던 바 "부업 삼아 농사짓던 신석기시대의 농경"이 되겠다.
신석기시대의 농경민은 파트타임이 아니라 전업 농경민이다.
거듭 말하지만,
조, 기장 농사가 시작되면 더 이상의 파트타임 농경이란 없다는 게 필자 생각이다.
산에 올라가 나물 뜯고 꿩 사냥 나간 조선시대 농부들도 그렇게 친다면 파트타임 농부일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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