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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초기 농경은 조 기장 등의 잡곡 농사를 수렵채집의 와중에 파트타임으로 지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이렇게 파트타임으로 할 수 있는 농사는 이 세상에 없다.
오히려 수렵채집이 파트타임으로 가능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초기농경이 제대로 성립된 영구적 촌락이 아니라
영 허술해 보이는 주거지 유적 등지에서 곡물이 떡 나오는 것은
이들이 화전을 바탕하여 주기적으로 주거지와 경작지를 옮기며 농사 짓는
전업 농경민이었기 때문이다.
수렵채집민이 아니다.
이들은 2-3개의 개활지를 몇 년 농사 짓다가
다시 다른 개활지로 옮겨 몇년 묵힌 (아마도 5-6년) 땅을 불을 질러 지력을 확보하고
거기서 다시 몇 년을 버티다 다음 개활지로 이동하고
몇년후에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는 식으로 농경을 운영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농경이 언제 항구적 정착지가 형성되고
주거지 근방의 토지를 주기적으로 휴경하는 방식으로 넘어갔는지,
이건 필자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며 고고학을 하시는 분들이 답을 내야 할 몫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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