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대부들처럼
복잡한 세상 모순 풀기 힘들다고
있는 땅 다 몰수해서 골고루 나눠주고 공동 살림 하자는 여전제를 개혁이라고 내세우는 바보들이나 그렇지 않겠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은 그것을 내세우건 내세우지 않건
자기 이익을 위해 살아간다.
이건 신석기 시대 사람이나 청동기시대 사람이나,
고려, 조선 시대 사람이나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나 모두 다 마찬가지다.
신석기시대 잡곡농경민이 어느날 갑자기 수도작을 선택했다면
우리는 "왜"라고 질문해야 한다.
그들은 뭔가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남부에서 멀쩡하게 잘 살던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건너갔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왜"라고 물어야 한다.
진흥왕이 북쪽으로 진군하다가 황초령 마운령 비가 세워진 어간에서 멈추어 섰다면
그리고 그 한계선이 뜻밖에도 왠지 윤관의 9성 북쪽 한계가 비슷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면
도대체 왜라고 질문해야 할 것이다.
일본이 서기 5세기까지도 말과 소가 그 나라에 없었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왜라고 질문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잡곡농경민이 어느날 수도작을 선택한 것도,
한반도 남부 사람들이 어느날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 것도,
일본에 5세기까지도 소와 말이 없던 것도
전부 나름의 경제적 논리가 작동한 결과라는 뜻이다.
우리는 물건 하나를 사는 데도 가격비교 사이트를 들어가 꼼꼼히 비교하지 않는가?
인류는 그렇게 지난 수백만 년을 살았다.
*** Editor's Note ***
필자가 말하는 왜? why?를 묻지 않는 고질이 한국은 물론이요 일본 직업 학문세계에서도 뿌리깊다.
왜를 묻지 않는 學이 성립할 수는 없다.
왜? 가 누락된 탐구는 단순한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기술로 일관하는 모든 글은 so what? 앞에 말문을 닫아 버릴 수밖에 없다.
내 글이 논문인가 아닌가는 내가 그 글을 써 놓고 나 스스로한테 so what을 물어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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