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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1차 고려거란전쟁] (3) 거란의 고려 공포증을 간파한 서희

by taeshik.kim 2024.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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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손녕을 만난 이몽전이 귀환할 때 성종은 서경에 머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 회견 내용을 두고 어떤 이가 말하기를 “어가御駕는 개경開京의 궁궐로 돌아가고, 중신重臣으로 하여금 군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항복을 청하게 하십시오.”라는 의견이 나온 데서 엿볼 수 있다.

아무튼 저런 안을 비롯해 어떤 방식으로 거란을 달래느냐 하는 중차대한 문제를 두고 조정 의견은 갈라졌다. 

개중에서도 “서경 이북 땅을 나누어서 저들에게 주고, 황주黃州에서부터 절령岊嶺까지 잇는 선을 국경으로 삼음이 옳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한데 중론은 결국 저 땅뙈기를 떼어주자는 쪽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이는 그만큼 고려로서는 급박했다는 뜻인 동시에 애초 거란 침입을 개무시하면서 그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못한 혹독한 대가였다. 

일단 이리 결정되자 고려는 서경 창고를 개방했다. 보통 쌀은 비상시에 대비해 최소 1년치, 많게는 3년치를 준비하는데 그것을 개방하고는 백성들한테 맘껏 가져가게 해도 쌀이 남아도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이 대목을 우리는 어찌 읽을 것인가? 그만큼 국가에서 거둬가는 물량이 많았다는 뜻이다. 백성은 주려 죽어가는 판에 쌀은 남아돌았던 것이다. 

이리 되자 고려는 거란이 남은 쌀을 가져가서 군량으로 쓰게 해서는 안 된다 해서 남은 쌀은 대동강에 던져버리게 한다. 실제 던져버렸는지, 아니면 던져 버리려는 방침이 발표되고 나서인지는 확실치 아니하나 이때서야 비로소 세 치 혀 서희가 나선다. 

약관 스무살에 장원급제하고 초고속 승진 코스를 달린 서희다. 아버지 잘 만났고 아들도 잘둬서 고려 초기를 호령한 명문 벌족 출신이다.

942년 생인 서희는 이때 쉰둘이었다. 이제 한창 관료로 중신으로 농익을 무렵이라, 세 치 혀도 그만큼 충천한 때였다.

그보다 여섯살 어린 우리 감찬이 형은 중늙은이가 되어 이때 겨우 장원급제해서 조정회의에서는 말단에도 끼지 못할 때였다. 

“식량이 충분하면 곧 성을 지켜낼 수 있으며, 전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병사들의 승부는 강하고 약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 다만 틈을 잘 보아 움직이는 것일 뿐이니, 어찌 경솔하게 버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식량은 백성들의 목숨과 같은 것이니, 차라리 적군의 군량이 될지언정 헛되이 강물에 버린다면 이 또한 하늘의 뜻에 맞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고려사절요)

성종이 듣고 보니 그럴 듯해서 방침을 철회하자, 서희가 다시 나섰다.

“거란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의 안북부安北府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점유했는데, 광종光宗께서 그곳을 취하여 가주嘉州·송성松城과 같은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지금 거란병이 침입하여 옴에 그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고자 한 것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그 말은 고구려 옛 땅을 취하겠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보기에 그 병사들 기세가 매우 성하다고 하여 성급히 서경 북쪽 땅을 나누어 주는 것은 계책이 아닙니다. 또 삼각산三角山 이북지역 또한 고구려의 옛 땅인데, 저들이 ‘골짜기는 채우기 쉬워도 사람의 마음은 채우기가 어렵다[谿壑易滿, 人心難滿]’고 하는 욕심으로써 싫증낼 줄 모르고 그곳을 요구한다면, 다 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땅을 나누어 준다면 곧 진실로 만세의 수치가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 등으로 하여금 그들과 한 번 싸워본 후에 다시 의논하게 하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동상) 

이 텍스트에서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 “고구려 옛 땅을 취하겠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 이라는 말이다. 이 말이 대체 뭘까? 

아무리 봐도 이 대목이야말로 서희가 거란을 되치기한 원천인데,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실상 이해가 언뜻 가지 않는다. 혹 귀 밟은 사람은 나를 깨우쳐주기 바란다. 

저 해석에 의하면 거란은 실상 고려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거란은 고려의 무엇이 두려웠을까? 

나아가 거란의 동경東京을 기점으로 고려의 안북부安北府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가 생여진 땅이라는 사실도 유념해야 좋다.

이 안북부는 아마도 청천강변일 텐데, 그렇다면 지도를 그리면 당시 생여진 점거 지역은 적어도 고려 거란 국경 인접지점을 그리면 대략 아래와 같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여진이라는 새로운 변수, 아니, 고려 거란 관계에서 언제나 중요하다 말은 하지만 언제나 그 중요성을 간과한 여진이라는 존재를 마주한다. 

내가 볼 때 이 여진이야말로 당시 동북아 질서를 좌우한 제1의 매개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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