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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후기를 살다간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정리한 수필집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2권에는 신라 관원官員의 숫자를 논한 글이 있으니
헌덕왕憲德王 3년(811)에 임금이 비로소 평의전平議殿에 나와서 정사를 들었다. 이때 나라의 관원들이 매달 여섯 번씩 참여하였는데, 문반文班이 710원員이고 무반武班이 540원이었다.
여섯 번 절을 한 다음 춤을 추면서 물러가다가 마루가 끝나는 계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걸어서 나갔다. 나라 사람들도 지위가 낮은 자가 높은 자를 보면 역시 이와 같이 하였다.
新羅官數
憲德王三年。始御平議殿。聽政。國官月六參。文班七百十員。武班五百四十員。六拜。舞蹈而退。至堂級。乃步。國人卑者見尊者。亦如之。
저것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언뜻 찾지 못했다.
삼국사기 헌덕왕본기에서는 그 재위 3년 여름 4월에 처음으로 평의전平議殿에 친히 왕이 참석해 정사를 들었다[始御平議殿聽政]고만 했지, 그 참석 규모를 밝히지 않았다.
혹 다른 기록에 저 숫자가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저 숫자가 확실한 근거가 있다고 할 때는 당시 신라 공무원 숫자를 가늠할 수치다.
물론 저에서 지방관들은 다 빠졌을 테니, 중앙공무원 숫자만을 말할 테고,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여타 공무원은 저런 자리에 참석 자격도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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