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초는 간단히 말해 실록을 편찬하는 원재료다.
그런 사초가 초래하는 각종 스캔들은 나라를 말아먹기도 하니,
근자 가장 대표 케이스가 박근혜 시절 청와대 수석을 지낸 안종범 업무수첩이다.
알려지기로 전 57권에 달한다는 이 수첩은 청와대 재직시절 대통령 지시 사항 등을 메모한 것이다.
또 이런 사초류로 이번 계엄 탄핵 정국에 직간접으로 관련된 인사들 메모가 등장하니, 진실성 여부는 차치하고 이것이 바로 사초다.
이 사초는 공문서 성격을 지니기도 하지만, 안종범 수첩이 극명하게 보여주듯이 사적인 비망록 성격이 강해서, 조선시대에도 이걸 개인이 보관했다.
물론 공식으로 제출하는 문건은 따로 있었지만, 이건 세탁을 거친 검열문건이었다.
조선시대 이 사초로 나라를 흔든 사건으로 흔히 김일손에서 초래한 김종직 사건이 대표적이거니와, 이른바 무오사화가 그 극단하는 표출이었다.
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곧바로 실록청이라는 임시 정부기구가 등장하고 이에서 전왕조 시대 역사를 편찬한다.
연산군이 즉위하면서도 곧바로 성종실록 편찬을 위한 이런 기구가 출범했다.
실록청이 설치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사관으로 근무한 사람들한테 그 일기를 제출하라고 명한다.
이 과정에서 김일손 사초와 그 사초에 포함된 그의 스승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이라는 글이 실록청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그 내용이 불손한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세조가 조카 단종을 몰아낸 일을 부정했다 해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벌어진다.
그에 관련된 사람들이 무수하게 처벌받고, 그것을 부정했다 해서 김종직은 부관참시까지 된다.
그런 김종직이 생전에 사초가 탑재하는 폭발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를 경계하는 글을 썼다는 사실이 아이러니 하기도 하다.
해동야언海東野言 권 제2 예종睿宗 조가 인용한 점필재집佔畢齋集은 사초를 토대로 하는 실록 편찬 과정의 어려움을 증언한다.
기축년 4월에 세조실록을 수찬修撰하기 위하여 을해년 이후 사직史職에 있었던 자는 모두 사초史草를 제출토록 했다.
그때에 민수閔粹도 사초를 바쳤는데, 얼마 후 그들 사초에 해당 사관의 본관 성명을 기재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민수는 대신들이 그의 직서直書를 보고 노할까 두려워서 몰래 봉교奉敎 이인석李仁錫과 첨정僉正 최명손崔命孫에게 (자신이 제출한) 사초를 잠깐 돌려달라 했으나, 돌려받지 못했다.
그러자 박사 강치성康致誠에게 요청했더니 강치성은 그 사초를 소매 속에 넣어서 내어다 주었다.
민수는 허둥지둥 고치고서 미처 정서를 못하고 되돌려 주었는데, 검열檢閱 양수사楊守泗와 최철관崔哲寬이 그 사초 중에 있는 정승들 이름을 지우고 다시 쓰고 한 것을 보고 참의 이영근李水根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이영근이 당상관堂上官들에게 (이런 사실을) 두루 알리니, 모두들 작은 일이 아니라고 하며 이에 임금에게 아뢰었다.
세조조에서 사관으로 일한 민수 또한 관례에 따라 수첩 형태인 사초를 제출했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해당 사초가 누구것인지를 실명으로 밝히게 하는 사초 실명제가 느닷없이 실시된 것이다.
문제는 그 사초가 꼭 팩트만을 정리한 메모만 아니라, 그 자신이 논평하거나 다른 여타 자료들까지 첨부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논평은 포폄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며, 이는 곧 실록청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관련되는 미묘한 사안들까지 내재 혼재되어 있었다.
이에 민수는 자신이 제출한 자기 사초를 잠깐 돌려달라 하고선, 그러한 내용이 포함된 부분들은 익명처리한 듯하다.
간단히 이 놈 나쁜 놈이다고 쓴 구절에서 그 나쁜 놈은 실명을 지워버리고서 다시 제출한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은 왕한테까지 보고된 것이다.
애초에 정언 원숙강元叔康이 아뢰기를, “사초에 이름을 쓰는 것은 옛 일에 어긋납니다. 그것은 두려워서 직필直筆한 자가 없을까 하여 그러하오니, 원하건대, 이름은 쓰지 말게 하옵소서.” 했지만 임금이 노하고선 듣지 아니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부정副正 김계창金季昌이 원숙강의 사초도 많이 고쳐졌다고 고하여서 (사초를 고친 민수와 원숙강을) 드디어 함께 의금부에 가두고 임금이 직접 국문하였는데, 민수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쓴 사초는 모두 대신의 일입니다. 그들 대신으로 말하면, 모두 실록각實錄閣에 있으므로, 신은 저의 사초에 의하여 제가 중상을 입을까 염려하고 고친 것입니다.”
라고 하고선 이어 대성통곡하며 다시 말하기를, “신은 독자이오니, 원하건대, 목숨이나 이어 주옵소서.” 하니, 상왕이 측은히 여겨 말하기를, “네 말이 거짓이 없구나. 내가 일찍이 서연書筵에 있을 때에 민수의 사람됨을 아는 바 있다 하고서 드디어 사장死杖을 면하여, 제주 관노濟州官奴에 속하게 했다.
강치성은 처음부터 사실대로 대답하지 아니하고 게다가 망령되게 성숙成俶을 끌어넣어 정상을 안다고 하다가 고문을 당하고서야 굴복하여 원숙강과 같이 참형에 처해졌고, 손인석孫仁錫은 그 실정을 알고서도 고발을 아니하였다고 하여 백 대 장벌杖罰을 주고 본관本貫의 군軍에 보충하였다.
이실직고?
말이 쉽지 그게 쉬울 거 같은가?
언론? 기자?
사실을 사실대로 밝혀주는 언론 기자를 원하겠지만, 천만에.
살다 보면 사실을 사실대로 밝힐 수 없는 때가 너무나 많다.
언론직필?
웃기는 소리들 그만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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