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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그 답을 찾아서 (4) 출세의 시작, 권적과 권정평 2

by 버블티짱 2023.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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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의 다른 고려 묘지명을 보면 혹시 힌트가 나올까?

권적과 비슷한 시기를 살다 간 이들의 묘지명 몇 가지를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공의 이름은 언이彦頤이고, 자字는 원로元老이며, 성은 윤씨로, 영평현인鈴平縣人이다. 증조부는 군기감軍器監을 추증받은 휘 선지先之이다. 조부는 태자대보太子大保를 추증받은 휘 집형執衡이다. 아버지는 개부의동삼사 추충좌명평융척지진국공신 수태부 문하시중 판상서병부사 영평현개국백 감수국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 推忠佐命平戎拓地鎭國功臣 守大傅 門下侍中 判尙書兵部事 鈴平縣開國伯 監修國史 上柱國 휘 관瓘으로, 문숙공文肅公으로 추증되었고, 태묘太廟에 들어가 예종睿宗 묘정에 배향되었다. - <윤언이(尹彦頤, ?~1149) 묘지명>

2) 돌아가신 낙랑군대부인 김씨는 경주인慶州人으로 신라 태종대왕大宗大王 김춘추金春秋의 14세손이다. 아버지는 수대보 문하시중守大傅 門下侍中 김경용金景庸이고, 할아버지는 중추원사 병부상서中樞院使 兵部尙書 김원황金元晃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수사공 문하시랑평장사守司空 門下侍郞平章事 김인위金因謂이다. 외조는 좌복야 참지정사인 최유부崔有孚인데, 유부는 즉 현종의 묘정에 배향된 공신 최항崔沆의 아들이고 신라의 학사이자 우리 태조의 공신인 최언위의 증손이다. - <이초원李初元 처妻 경주김씨(慶州金氏, 1079~1152) 묘지명>

3) 공은 곧 신라 때의 조산대부朝散大夫 왕공식王公式의 7세 묘예(苗裔, 먼 후손)이다. … 공은 밀성인密城人이다. 아버지의 휘는 수壽이고, 조부의 휘는 집충執忠이며, 증조부의 휘는 응걸膺傑이고, 외조부의 휘는 정민正民인데 모두 호장이었다. - <박朴 아무개(1085~1151) 묘지명>

 

윤언이 묘지명


1)은 윤관(?~1111)의 아들이자 김부식과 맞짱을 뜬 것으로 이름난 윤언이의 묘지명이다. 윤언이는 권적과도 인연이 있어서, 묘지명에 따르면 그가 권적을 조정에 천거하였다고 한다.

그는 파평윤씨坡平尹氏다. 이 가계도 태조의 삼한공신三韓功臣 윤신달尹莘達로부터 시작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윤언이 묘지명>에서는 그의 증조부, 조부, 아버지만을 기록하고 있다.

외조마저도 기록하지 않고 철저히 부계만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먼 조상도 적지 않은 것이다. 이는 <권적 묘지명>의 그것과 똑같다.

그러면 이는 12세기 묘지명의 일반적인 출자의식 표기인가?


2)는 문하시중 김경용(1041~1125)의 딸 경주김씨의 묘지명이다.

이를 보면 그렇지만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조를 모두 기재했을 뿐만 아니라, 증조 이상의 먼 부계父系·모계母系조상이라도 1) 신라 왕실 2) 태조공신太祖功臣, 3) 묘정廟庭 배향공신配享功臣을 모두 드러낸 것이다.

1)과 2)는 모두 당시의 '문벌門閥'에 해당하는 파평윤씨 윤관 가계, 경주김씨 김경용 가계 인물의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문벌(귀족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 용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에만 해당하는 사안이었을까?

3)의 사례는 또 그것도 아님을 보여준다.


3)은 복야僕射(2품)를 지낸 밀성박씨密城朴氏 박 아무개(1085~1151)의 묘지명인데, 여기선 그의 사조가 모두 호장임을 밝히는 동시에 신라 조산대부朝散大夫 왕공식王公式의 7세손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왕공식 또는 왕식王式이란 인물이 누구인지는 다른 기록이 없어서 모르지만, 적어도 박 아무개의 가계 내부에서 현조顯祖로 인식된 이였음은 분명하다.

왕공식이 박씨가 아니기는 하나, 고려시대에는 아버지 쪽과 어머니 쪽의 선대를 모두 자기 조상으로 인식하였으므로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재미있는 것은 1)과 3), 그리고 <권적 묘지명> 모두 김자의(金子儀, ?~?)라는 한 사람이 지었다는 사실이다.

김자의는 12세기의 문신이며 지제고를 역임할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였다.

그런 그가 적어도 출자의식의 표기에 있어서는 1) 부-조부-증조부만 드러내거나 2) 부-조부-증조부-외조부+a로 하거나 이 두 가지를 혼용하고 있는 것이다.

윤언이의 아버지는 관료였고 권적의 조부 이상과 박 아무개의 사조는 향리였던 걸 보면, 이러한 표현의 차이는 가계 선대의 신분과도 크게 상관이 없었다.

묘지명은 지면 제약 때문에 꼭 필요한 사실만을 뽑아내 기록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럼에도 이런 차이가 나타난다는 것은, 가계마다 부각하고 싶은 사실이 달랐음을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12세기는 고려 사회의 안정기였다. 이 시기의 고급 관료 중 일부는 자신이 속한 가계의 명망인 족망族望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는 가계를 수식하고 남들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너나 나나 아무렇게나 남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굳이 적지 않더라도 가계의 권위가 모자라지 않게 된다면, 굳이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 예로 12세기의 문벌 중 하나인 광양김씨의 어떤 인물은 묘지명에서 선대를 기록하며

"그 선조는 본래 신라新羅에서 나왔는데 ... [고조할아버지]의 아버지 김길金佶은 중대광重大匡인데, 김길 이상으로는 옛 풍속에 족보가 없어서 모두 그 이름을 잃어버렸다."(<김의원(金義元, 1071~1148) 묘지명>)

고 솔직담백하게 적을 정도였다.

럼 다시 우리의 권적 선생으로 돌아와서, 권적의 선대 권행이 태조를 도왔던 공신임에도 <권적 묘지명>에서 이를 구체화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권적 묘지명>에 권균한 이전의 선대가 기재되지 않았다는 것은, 권적이나 권적 가계의 구성원이 그것을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겼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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