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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내무부 주사

by taeshik.kim 2019.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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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고사가 끝났다. 어느 대학 어느 과를 택할지 하는 문제가 남았거니와, 일전에 내가 한 말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난 스스럼없이 Y대 영어영문학과를 선택했으니, 이는 중3때인가 작은 경험에서 비롯하거니와, 이 얘기를 새삼 되풀이하고 싶지는 아니하다.


까막눈이요, 대입 제도를 비롯한 교육제도에는 전연 더 까막눈일 수밖에 없는 부모님은 생평 그런 내색한 적 한 번 없으나, 내가 서울로 가겠다 했을 적에 적지 않이 당황했으리라 본다. 공부하라 그리 닥달하고, 특히 엄마는 때론 부지껭이로 아들을 두들겨 팼으니, 그런 아들이 서울로 유학한다 선언했을 적에, 이제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쳤을 것이로대, 모르긴 해도 엄마 아버지 두 분은 이 난관을 어찌 돌파하느냐 하는 문제로 골을 싸맸을 것임이 불문해도 가지하다.


결론을 말하자면, 부모님은 나의 서울 유학 결심 혹은 통보에 그 어떤 말도 아니했으니 적어도 겉으로는 반대가 있을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 공부하라는 말만 할 줄 알았지 당신들은 그에 대해선 전연 무지한 처지였으니, 그리하여 당신들이 짜낸 묘안이란 것이 부천 막내누님 집에다가 나를 투척한다는 것이었다.


선친이야 워낙에 과묵했지만, 실은 당신 스스로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생평 나랑 몇 마디를 나눴는지도 모를 정도다. 그만큼 말이 없었다. 다이쇼시대에 태어나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탄광 노무자로 끌려간 소백산맥 기슭 문중 소작농으로 배운 것도 전연 없으니, 아마 그래서 더했을 것이다.


엄마랑은 성격도 전연 달라, 난 두 양반이 어찌 살았나 지금도 미스터리다. 이런 선친이었으므로, 당신한텐 손찌검 당한 기억이 없다. 그런 선친이 딱 한번 예외와 같은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국민학교 시절인데, 이 양반이 지례 오일장에서 가서는 내 검정 고무신 한 켤레를 사 갖고 왔다. 그 직후 마침 대찬 비가 왔다. 시냇물이 순식간에 불었다. 이럴 때 우리는 족대를 들고는 시내로 나간다. 불어난 강물을 따라 물기고가 역류하거니와, 그 역류하는 고기 잡으러 나간 것이다. 한데 재수가 없으려니, 이 고무신 한 짝이 벗겨져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 고무신 찾는다고 강물을 따라 십리를 따라 달려 내려가 그것이 떠내려지 오지 않나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기도 했더랬다. 허망하게 고무신을 잃어버린 사태를 파악한 선친이 불호령을 쳤다. 그렇다고 내가 맞지는 않았는데, 열나 화를 내는 것이었다. 순딩이만 같은 당신도 화는 낼 줄 알았다.


이런 선친과는 여러 모로 엄마는 딴판이라, 뺑덕어멈 저리 가라 수준이라, 지금도 이 냥반 성깔이 전연 죽지 않아, 때론 분노조절장애가 있지 않나 할 정도로 성질을 버럭버럭냈으며 걸핏하면 부지껭이나 지게작대기를 들고는 아들을 팼다. 뭐 요새도 보니, 같이 사는 동생이랑 하루 삼세판은 대판 쌈박질이라, 힘이 떨어지니 어쩔 수가 없어, 동생한테 매번 일방적으로 당하더라. 배추도 소금에 절이면 숨이 죽는 법인데, 이 냥반은 절일 수도 없다.


내가 서울 유학을 통보했을 무렵이다. 그 불같은 엄마가 지나가면서 툭 던졌다.


"내무부 주사가 어떻노?"


고 김종호 국회부의장. 이 냥반이 내무부 주사 출신이다.



그러면서 나는 이 냥반이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그 지역에서는 꽤 이름 높은 지방국립대 이름을 들면서 그 학교(현지에서는 학교는 없다. 언제나 '핵꾜'다) 법학과를 들면서 "난 니가 X대핵꾜 법학꽈가마 했다"고 했더랬다. 이 말을 듣고는 아따 이 냥반이 어디서 지끼는 말을 듣고는 옮기는갚다 했더랬다. 아마도 엄마한테 이런 말을 하는 동네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당신들한테는 곧 죽어도 법학과였고, 곧 죽어도 그것이 아들이 공무원으로 나가는 길이라 생각했으며, 그 공무원 표상은 언제사 주사였으니, 그렇다면 하필 내무부 주사였던가?


산골 오지에 가끔 내무부 주사가 순시를 나오는 적이 있었다. 순사와 더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내무부 주사나 순사가 한번 뜨면, 온동네가 계엄령이었고 비상사태였다. 혹자는 이것이 식민지시대 유산이라 하는데, 까라마이싱이다. 조선시대 유습이다. 관직만 시대가 바뀌어 주사 순사로 변했을 뿐이고, 그들이 주는 공포는 조선시대 유습이었다.


그 무렵엔 나는 내무부 주사와 법학과를 운운하는 엄마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갑다 했더랬다. 한참이 지나 생각하니, 돈 때문이었다. 아들을 서울로 유학 보낼 형편이 도저히 아니었고, 더구나 아무리 짱구를 굴려도 그 막대한 입학금 등록금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가 없었더래면 나는 대학을 못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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